出家(출가)
부처님께서 출가하신 이유는 ‘四門遊觀相사문유관상’이라는 게 일반론이다. ‘사문유관상’은 부처님 일대기를 다룬 八相成道중의 하나로, 왕자 신분이던 부처님이 잠시 궁전을 나와, 백성들이 사는 성 안을 둘러보다가, 고통에 신음하는 백성들의 삶을 보게 되고, 그 고통을 해결하는 방법을 찾아야 겠다, 결심하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이후 많은 학자들이 한층 더 무게를 싣고 있는 쪽은 ‘사문유관상’보다는 그럴 수밖에 없었던 절실함, 그 자체이다. 부처님이 살고 있는 작은 나라 카필라 성은 주변의 마가다국을 비롯한 큰 나라로부터 시시때때 침공의 위협을 당했고, 부처님은 어려운 나라뿐만 아니라, 고통받던 백성까지 책임져야 하는 왕자의 자리, 즉 차기 왕의 자리에 있었다. 허나 그게 부담스러워서나, 개인적인 허무나 편의를 위해서 출가한 것은 아니다. 부처님은 설사 성왕이 되어, 나라를 잘 다스려 태평성대를 이룬다 해도, 근본적인 백성들의 고통, 즉 생로병사의 고통은 해결해줄 수 없음을 알고 아파했던, 대자대비한 사람이었다. 그가 보는 백성들은 늙음, 죽음, 병듦, 폭력 등에 노출되어 고통받고 있었다. 그 고통이 너무나 가슴 아픈데, 구해줄 수도 없으면서 가슴만 아파한들 무슨 소용이 있는지, 스스로 생각해도 오류로 느껴졌다. 출가 전 부처님의 고뇌하는 모습은 경전 곳곳에 전해진다. 오랜 사유 끝에, 그는 타인과 자신을 모두 구제하는 길은 그 고통에서 벗어나는 해법을 찾아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고, 그러기 위해서는 출가가 답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6여 년간의 죽을 고통과 시행착오를 겪으며 수행하여, 마침내 그 해답을 얻어내는데 성공하였다. 종교학자들은 부처님의 출가를 두고 ‘위대한 포기’ -The great Renunciation-‘라고 부른다. 포기라고 하면 뭔가 부정적 의미로 느끼기 쉽지만, 포기만큼 쉽고도 어려운 것이 없다. 우리는 포기를 모르는 인간이 위대하다, 길러졌다. 불굴의 인간, 인내, 극기, 노력, 꿈은 이루어진다, 등등. 포기보다는 취함을 칭송하는 학습 선상에서 살았고, 살고 있고, 살아갈 것이다. 즉, 다른 말로 하면 끝없는 욕심으로 점철된 삶을 살고 있다. 욕심 또한 부정적인 뜻처럼 쓰이지만, 꿈 또한 다른 말로 하면 욕심이다. 갖고자 하는 마음, 그것이 없다면 인간은 지표를 잃을 것이다. 그렇게 길들여졌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욕심을 내려놓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부처님의 출가를 ‘위대한 포기’라 부르는 것은, 세인들이 가치있다 여기는 그 모든 것, 평범한 이들이 감히 할 수 없는 것을 포기한 까닭이다. 그것이 부처님의 출가이다. 한번은 우리 불자들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지금 현재 갖고 있는 모든 것을 다 버릴 수 있는가?’ 누구든지 한번 시도 해보길 권한다. 그러면 다른 건 몰라도, 스님들이 자신과 많이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조금은 이해하게 될 것이다. 자식도, 가족도, 돈도, 명예도, 사랑하고 사랑받던 그 모든 것을 하루아침에 놓아버리는 것이 출가이다. 이유는 단 하나, 모든 속박을 벗어나 대 자유를 얻기 위해서다. 아시다시피 속박 없는 사랑은 세상에 없다. 무언가 갖고자 집착한다면, 그 순간 그것은 우리를 묶는다. 속박을 끊어버리는 방법은 버리는 것이다. 세속의 부와 명예를 추구하는 입장에서는, 가진 것을 다 버리라 하면 못 버릴 그 입장에서는, 절대로 이해 못할 자리이다. 그러나 옳고 그름의 자리도 아니다. 다만, 행복에 대한 가치의 문제일 뿐이다. 다 가진 자는 다 버린 그 자리가 무엇인줄 모른다. 다 버린 자는 갖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다. 올 3월8일은 출가재일이다. 부처님의 출가의도를 기념하는 날이자, 세상의 모든 출가자들을 기리는 날이다. 왜? 부처님의 출가로, 지난 오천여년에 이르는 동안, 셀 수 없이 많은 佛子들이 행복을 찾았기 때문이다. ‘수행자, 저 욕망의 숲을 나와, 저 영혼의 새벽강가에 앉아있는 사람. 저 구름을 헤치고 나온 달과 같이 이 환락의 생활을 깨끗이 졸업해 버린 사람. 세상의 애착을 모두 버린 채 바람처럼 물처럼 가고 있는 사람.’ -法句經법구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