平常心(평상심)
완연한 가을이다. 나무마다 단풍 들기 시작하고 해가 부쩍 짧아졌다. 지난달 9월 1일엔 7시 36분에 해가 졌고, 9월 마지막 날엔 해가 6시 50에 졌다. 해지는 시간이 월초에 비해 월등히 빨라졌음을 알 수 있다. 해 뜨고 지는 시간은 하루에 일분씩 변화하는 것에 불과하지만 한달이면 이렇게, 한 삼사십 분의 차이가 난다. 일출과 일몰 시간을 체크하는 것은 이 중의 주요 일과 중 하나이다. 낮에는 뜨겁기도 하고 다른 일상으로 분주하기도 하여, 주로 아침 공양 후와 석양 무렵에 바깥일을 많이 하는데, 여름과 달리 요즘처럼 해가 일찍 지면 저녁에 일할 수 있는 시간이 많이 없어져 버린다. 이것은 약간 슬픈 일이다. 힘든 일을 안 하니 더 좋지 않겠나, 생각하겠지만, 아침보다 석양 무렵에 일하며, 자연과 이야기 하는 시간이 하루 중 가장 행복하기 때문이다. 벗어놓은 장갑을 슬쩍 집어가는 놈, 마치 나뭇가지에 앉듯, 어깨에 날아와 자연스레 앉는 잠자리, 파헤친 흙에 놀라 후닥닥 숨는 지렁이, 갑자기 들이닥친 물에 이삿짐 이고 줄줄이 이사 가는 개미들, 코 앞에서 들여다보는 줄도 모르고 꿀 먹기에 바쁜 벌새라든가… 이런 자연들과 함께 있다 보면, 그들이 하는 얘기를 저절로 알게 되고, 이런 온도와 저런 습도를 좋아하는 나무와 꽃들과 풀, 벌레들의 취향을 알게 되고, 그들이 살아, 나도 살고 있음을 새삼 알게 되고, 모든 생명들의 생에 대한 절실함과 간절함에 대해서도 눈물겹게 알게 된다. 나아가 자연의 운행과 세상의 변화를 감지하게 되고, 이 밖에도 자연이 주는 가르침은 수없이 많다. 가장 중요한 건, 일상이 道,임을 저절로 깨닫게 해준다. 이러한 속내를 모르는 입장에서는 스님이라는 이가 매일 땅바닥에 엎어져 풀이나 매고 흙투성이가 되어 돌아다니니, 힘들겠다, 안타깝게 보는 이도 있지만, 정작 본인에겐 이 시간이 휴식이다. 그렇다고 다른 일을 다 팽개치고 이 일에만 전념할 수도 없으니, 해가 짧아지는 것은 진정 아쉬움이 아닐 수 없다. 짧아지는 해를 쪼개다 보면, 일 분, 일 초의 해를 온전히 느끼게 되고, 하루해가 얼마나 소중한지 매일 느끼고 감사하게 되고, 오늘을 살아내는 일에 최선을 다 하게 된다. 이러한 일상을 지난 몇 년간 한결같게 살아오는 동안, 저 남전 스님의 ‘平常心是道평상심시도’라는 말의 기미를 새삼 다시 알아채게도 되었다. 우리는 다 그런다. 불교를 공부하는 이든, 아니든, 뭔가 道는 저 멀리 근사한데 있을 거라 생각한다. 어느날 갑자기 뭔가 거대한 것으로 쿵, 하고 올 것이라 기대한다. 쿵 하고 오든, 쩍 하고 오든, 어쨌든 매일매일, 그야말로 ‘行住坐臥 動静’간에 이 道를 늘 찾지 않고서는 道는 오지 않는다. 매 순간 거기 道가 있어야 한다. 불자들을 보면서 제일 안타까운것이, 울력이든 공부든 간에, 어느날 갑자기 불뚝 신심을 내어, 일 년치를 한꺼번에 하려는 사람처럼 덤비다가도, 바로 다음날 심드렁해져서 나중에 하지요 뭐, 하는 자세를 보이는 것이다. 불교를 가르치는 입장에서 가장 힘든 부분이다. 뭔가 거창한 게 道가 아니다. 밥 먹을 땐 밥을 온전히 먹고, 공부하되 하루 단 일분이라도 꾸준히, 오늘도 내일도 한결같은 자세로 하는 것이 道이다. 그 일분이 큰 차이를 만든다. 하지만 늘 신도들은 오늘도 내일도 말고, ‘언젠가’ 하리라, 한다. 평상심은 道門에 있어서 참으로 중요한 것이다. 마음에 동요됨이 없이 늘 처음처럼 이어간다는 것, 그 자체가 道이기 대문이다. 이 말에 펄럭 거리고 저 일에 헐떡 거리며, 하다 말다 하면서 평상심을 논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복잡한 세속에 살면서 평상심을 늘 갖는다는건 어렵다는 걸 안다. 그렇기에 절에 와서, 억지로라도 끊임없이 힘쓰는 가운데, 道가 조금씩 익어간다는 것을, 그런 뒤라야 세속에 나가서도 그道를 꺼내 쓸 수 있다는 것을, 단 한 사람만이라도 알아채주는 게 원이건만, 그게 늘 어렵다. 한 수좌가 물었다. ‘무엇이 평상심으로 道에 합치하는 것입니까.’ ‘차를 마시고 밥을 먹으니 세월이 지나고, 산을 보고 물을 보니 마음이 상쾌하다. -文欽禪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