會者定離(회자정리)
이주 전, 불자佛者 한 분이 불교를 버렸다. 쓰고 보니 심장이 쿡, 다시 쑤신다. 하필이면 부처님 오신 즈음에, 더 자주 만나야 할 이때에. 소월 시인은 ‘가시는 길 사뿐히 즈려밟고 가라’고 진달래꽃까지 뿌려준다 했지만, 이 중은 그만큼도 도인이 되지 못해서 꽃은커녕, 그저 아프다. 사랑하던 사이의 이별에 있어서 이유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너를 위해서라거나, 코가 미워서라거나, 성격이 나빠서, 돈이 없어서라거나, 네가 소리 내어 밥을 먹어서…뭐든간에, 이별의 정의는 ‘너를 만나기 싫다’이다. 만나도 더 이상 행복하지 않기 때문에, 널 위해서 시간이든 돈이든 에너지를 더 이상 쓰지 않겠다, 이다. 여타의 백가지 이유는 다 그저 예의이거나, 페인트이건, 비겁함이거나 등등일 뿐이다. 그런 뜻에서 그가 불교를 버린 것 또한 불교를 만나도 행복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찌하여 불교가 그에겐 갑자기 행복하지 않은 것이 되었는가. 그에게는 쉬는 날 따뜻한 피자와 잠깐의 낮잠, 가족과의 소풍이 절에 오는 일 보다 더 행복일지도 모른다. 이해한다. 그런데 그는 그 행복을 버리고 애초에 왜, 무엇을 찾아 절에 왔던 걸까? 왜 절은 그것을 주지 못 했을까? 그 답답함은 풀 뽑는 손등에 눈물이 되어 떨어졌다. 버린 자는 모르는, 버려진 자의 아픔이다. 이 중은 무언가 찾으러 왔다 떠난 사람들이 절에 와서 찾는 것을 줄 수 없다. 이 중은 성직자로, 그저 부처님 법대로 살고 부처님 법을 가르치는 이 일뿐. 그들이 원하는 것을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 백 천 번 말을 했건만, 사람들은 여전히 여기와서 ‘무엇인가’를 찾는다. 그리고 그 찾는 것이 없으면 떠난다. 그런데 중요한 건 그 ‘찾는 것이 애초에 여기 없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찾아온 동기 자체가 틀렸던 거지, 불교가 틀린 것이 아님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그런데 그걸 그들에게 전해줄 길이 없기에 답답하고 아픈 것이다. 이를테면 ‘절에 갔는데 밥을 안차려주더라’ ‘친절하지 않더라’ ‘힘들다’며 떠나는 이들에게 무엇을 말해줄 수 있겠는가. 그들이 찾는 ‘그런’ 절은 애초에 없는 것인데. <화엄경> 입법계품은 선재동자가 53선지식을 찾아 길을 떠나고 법을 듣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선재는 한 선지식을 만나기 위해서 무려 13년을 걸어가기도 한다. ‘그까짓’법 한마디 듣기 위해서 1년을 말이다. 그는 ‘무식’하게도 왜 그랬을까, 답은 그 법을 들으면 행복했기 때문이다. 발이 부르트고 배가 고파도, 그 법 한마디가 행복이었기 때문이다. 육신의 안락이나, 부귀영화나, 한때의 즐거움이 아니다. ‘마음의 행복’이다. 이 불교의 명백한 본질을 , 시작하는 불자들이 제발 부탁하건데 알아주었음 한다. 진정한 ‘나와 마음 찾기’ 그것 밖에 없다. 그 길은 그다지 달콤하지도, 하려하지도, 풍악을 울리는 일처럼 즐겁지도 않다. 그저 묵묵히 부처님이 행했던 그 길을 따라, 걷는 일일 뿐이다. 그러다 보면 참 자유와 행복을 만나게 되는 길이다. 다시 말하지만, 재밌는 그 밖의 것은 아무것도 없다. 지난 이십여 년 간, 이곳에 왔다 떠난 스님이 제일 오래 머문 기간은 2년이 채 못 된다. 이 산승은 현재 만 6년여를 머무르고 있으니 기록을 넘어서도 한참을 넘어섰다. 그 세월동안 새 절도 마련하고, 공부 열심히 하는 불자도 만들고, 안팎으로 성장도 있었지만, 한편, 연세 드셔서 더 이상 못 오시는 분을 다수로 하여, 많은 이들이 왔다가 떠났다. 그 누구든, 이유가 뭐든, 떠난 이들은 아픔으로 기억된다. ‘會者定離회자정리’라고 하였다. ‘만난 이는 반드시 헤어진다.’는 부처님 말씀이다. 그렇기에 이 중은 가는 이를 잡지도, 오는 이를 깜짝 반기지도 않는다. 그저 오늘도 선재동자처럼 영화사에 오는 이들, 언젠가 돌아설 이들, 언젠가 사라질 이들을 봄날 꽃 보듯이 그렇게 본다. 그 꽃이 떨어질 때가 반드시 있음을 알아, 그 꽃이 오늘 보고 다시는 못 볼 꽃임을 알아, 아프고도 소중하게, 그렇게 본다. 그리고 만남도 이별도 다 無常무상 임을 새삼 깨우치며, 오늘도 걷는다. ‘나무는 꽃을 버려야 열매를 맺고, 강물은 강을 버려야 바다에 이른다.’-<화엄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