願(원)
요즘은 조석 예불때 ‘이산혜연선사발원문’을 염송하고 있다. 동안거 백일기도중이라 뭔가 조금 더 절실함이 필요해서다. 아는 이는 알겠지만 혜연선사의 발원문 내용은 정말 절절하다. 수행도 늙는가, 출가 때의 그 간절한 신심도, 환희심도, 원력도 희미해지는 듯하여, 다시 이익, 힘을 내자는 뜻이 서서다. 새들도 깨어나기 전 고요한 새벽, 부처님께 맑은 천수, 향 올리고 고요히 울려 퍼지는 목탁소리에 맞춰 ‘…점잖은 거동으로 모든 생명 사랑하여, 이내 목숨 버리어도 지성으로 보호하리…’하다 보면, 문득 목이 멘다. 선사의 절실한 마음이 가슴을 쳐서다. 나도 그렇게 하리라, 절로 되새기게 된다. 사람들은 기도라 하면, 특정 신한테 복을 비는 것으로 알고 있는 이가 많다, 불가에서의 기도란 그런것이 아니다. 두두물물이 다 법이며 부처님인 이 세상에, 즉, ‘시방삼세 제망찰해 상주일체 불타, 달마, 승가야중’에게 하는 것이다. 그것은 곧, 인드라망의 구슬처럼 얽혀있는 우리, 지중한 인연법과 허공 같은 불성에게 하는 것이며, 목적은 탐진치에 물든 미명의 내가 밝아지길 원하는 것이다. 기도는 바로 願(원)이다. 원이란 부자가 되게 해달라거나 합격하게 해달라거나 그런것이 아니다. ‘행선축원’도 그렇고 ‘혜연선사발원’도, 천수경 한편 속에도 수많은 願이 등장하는데, 그 모든 원들은 ‘원아광도제중생’, 모든 중생을 다 제도하길 원하옵니다, 와 같은, 나만이 아닌, 타인에게 회향되길 바라는 것이다. 일신의 부귀영화나 바라는 것을 두고 원이라 하지 않는 것이다. 다른 말로 發願(발원)이라 하는데, 조금 쉽게 설명하자면, 부처님과의 굳은 誓約(서약) 같은 것이다. 내가 이러이러한 것을 하겠다, 는 것이다. 그러니 부처님께서 이 원을 이룰 수 있도록 밀어 주십시요, 이다. 그래서 발원을 하기 위해서는 순차적으로 먼저, 부처님에 대한 절실한 마음이 필요하다. 왜냐, 우리는 새해에 이런저런 소망들을 품고 계획도 거대하게 세우지만, 어느새 쉽게 잊고는 흐지부지하게 된다. 자신과의 약속을 어기는 일엔 모두가 관대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작심삼일 이라는 말도 생긴 것이다. 하지만 타인과의 약속은 어떤가. 가령, 어린 동생한테 사탕사주겠단 약속 정도는 어겨도 큰 탈 없겠다. 하지만 친한 친구와의 약속은? 상사와 한 약속은? 거액이 걸린 바이어와의 약속은? 목숨을 건 맹세는? 상대와 상황에 따라 지키지 않았을 때의 데미지도 각각이다. 그래서 중요한 약속일수록 그 약속은 반드시 지키게 된다. 만약 부처님이 시답잖다면, 그 앞에서 발한 원 또한 흐지부지 될 것이다. 이것은 부처님은 계신가, 아닌가, 그런 문제가 아니다. 이미 그런 마음으론 기도 자체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알 것이다. 흐지부지 않고 간절할, 맹세를 하고 깰 수 없을 상대로서의 부처님, 그 맹세를 증명하고 밀어줄 귀의처로써의 부처님인 것이다. 부처님을 믿으므로 해서 ‘발원’할 수 있다는 것이 포인트인 것이다. 신구 선지식들은 말한다. ‘깨달아 한 바퀴 다시 돌고 와도, 믿을 건 부처님 뿐’이라고. 부처님을 정말 중하게 여긴다면, 그 앞에서 한 맹세를 어찌 지키지 않겠는가. 매일매일 실천하기를 바위같이 한다면, 그 일 또한 이루어지지 않을 리가 없다. 그것이 기도요 그것이 발원이다. 부처님께 흔히 세간에서 말하는 복이나 내려주십사, 백날 기도해 봤자 그 기도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런 게 기도라면 이 중은 하지도 않을 것이다. 백일동안 하기로 하였으면 백일, 산문 밖으로 한걸음도 내놓지 않고, 단 한 번도 어김없이 하는 것, 그런 철저한 기도 끝에는 반드시 큰 득력과 효험이 있는 것, 진정으로 믿기에 한다. 득력이 곧 도력이고 그것이 곧 부처님의 가피이다. 새해를 맞이하여 누구에게나 이런 저런 소원들이 있으리라 믿는다. 그 원이 무엇이든, 당신이 누구든, 새해엔 그 원이 다 이루어지길 발원하다. 왜냐고? 당신과 나는 하나이므로. ‘그대가 바라고 원하는 모든 일들이 속히 이루어지기를! 보름달이 가득 차듯이 모든 바람이 가득 차기를! 소원을 빌면 이루어지는 마니보주처럼, 그대의 소원이 다 이루어지기를! -법구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