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는 것은 없다
한창 공부할 때 참선중에 멀리 눈앞의 종각이 산산이 부서져 가루가 되어, 마치 신기루처럼 공중으로 흩어지는 것을 두 눈 멀쩡히 뜨고 앉아 보았다. 그 미묘한 색색의 미립자들이 사라지고 난 자리엔 텅 빈 허공이 남았다. 그 순간 존재의 공성을 알았던 거 같다. 대체 무엇을 알고 있다는 건지, 존재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 고저, 미추, 분별 따위의 질문이 허공으로 같이 흩어졌다. 만물은 저마다 인연시절로 집산할 뿐, 존재, 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을, 무아이며 무상임이 알아진 것이다. 이것은 이해,의 차원이 아니다. 다시 종각은 제자리에 돌아왔지만 이미 그 종각은 전의 종각이 아니었다. 그걸 알았다고 해서, 겉으로 보여지는 이 중의 모습이 뭐 그닥 달라진 건 없다. 다만 오랜만에 유리창 위 커튼을 확 뜯어버린 그런 느낌이랄까...시원하고 삶이 환해졌다. 비로소 멀리서 다른 나라 말처럼 들리던 부처님의 말씀, 큰스님 말씀이 절로 알아졌다. 통역 없이 다른 언어를 알아듣는 순간처럼 편안해졌다. 마음이 열린 것이다. 언제 어디서든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산다’는 것은 생각보다 경이롭고 아름다운 일이다. 사물에 얽매이지 않고 시비에 얽매이지 않고 바람처럼 주체적으로. 간혹 처에 따라 걸리는 존재가 눈에 보인다 해도, 그것이 유형의 존재가 아니라, 내 안의 존재임을 꺼내들 수 있어서, 바로 걸림에서 해방될 수 있다. 이것이 이 중이 도달한 공부의 끝은 아니다. 그러나 이 도리만으로도 삶은 많이 변했다. 그래서 이 도리를 많은 사람들이 알기를 바랬다. 함께 공유하고 싶었다. 처한 자리에서 바로, 대단히 삶을 아름답게 살 수 있음을. 그저 식자로가 아니라 본인이 체달하여 알았기 때문에, 누구나 할 수 있다 여겼다. 그런데 이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고, 언어로써 만의 소통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후론, 좀 막막해졌다. 물을 억지로 먹일 순 없다. 스스로 목이 말라야 한다. 목마르지 않다는데 물을 주는 격이다. 여하튼, 기해년도 흘러 연말이 되었다. 기해년이라는 어떤 존재가 있다가 어디로 간 것이 아니다. 시절인연이 변화한 것뿐이다. 인연 집산에 따라 봄이 되고 여름이 되고 겨울이 되고, 다시 봄이 되고... 자연 법칙에 따라 반복 변화 하는 와중에 있는 것이지, 무엇이 있어 어디로 간 것이 아니다. 갈 수도 없다. 사람도 그렇게 몸이 바뀌고 있을 뿐이다. 있다고 여겨지는 그 몸도 고정불변의 것이 아니고, 흘러가고 변화하는 것이다. 각자의 업에 따라 다르게 변화한다. 그렇게, 새는 날고 꽃은 피는 와중에, 연기법에 따라 삶도 집하고 산하는 것인데. 그게 영 와 닿기 어렵고 죽어도 있어서, 세월은 가고 사람은 죽는다, 이다. 설령 인연 집산일 뿐이라고, 머리로는 이해한다고 해도, 중생은 사라지는 것이 두렵다. 어떻게 해서든 오래 머무르고 싶다. 그래서 나이 들수록 세월 가는 것이 아쉽다. 사라지기 싫은 것이다. 그러나 애초 없다면 무엇이 사라지겠는가. 그 공성의 의미를 안다면 다 쓸데없는 걱정이다. 사라지는 것에 대하여 허심탄회하지 못한 것은 있다, 라는 집착에서 온 것이다. 그것이 온전히 착각이라고 해도, 안 믿어진다. 믿든 안 믿든. 어느 세상에서든 가는 것은 없다. 가는 것이 없다면 또한 당신도 갈 수 없다. ‘이미 가버린 것에는 가는 것이 없다. 아직 가지 않은 것에도 가는 것은 없다. 이미 가버린 것과 아직 가지 않은 것을 떠나서, 지금 가고 있는 중인 것에도 가는 것은 없다. ’ ㅡ중론中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