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에게는 봄이 왔습니까
작년 이맘때는 영화사 들판이 정글처럼 풀이 무성했는데, 그래서 5에이커나 되는 그 정글을 깎는 일이 정말 큰일이었는데, 올해는 민들레꽃 한 송이 피어나지 않는 빈 들판이다. 로컬 뉴스에서는 매일 강과 호수의 줄어든 물을 보여 주고, 식당에서는 그냥 주던 마실 물도 제한한다 하고, 시에서는 잔디 물주는 것도 줄이라고 하는 등, 캘리포니아는 현재 가뭄이다. 이런 까닭에 매일 물을 줄 수도 없어서 영화사 정원도 지금은 목이 무척 마른 상태다. 들판에 풀이 자라지 않으니, 방목하는 소들은 먹을 것이 없고, 남의 집 잔디 깎아주며 생계를 잇는 먼 나라에서 온 일꾼들에겐 일이 없다. 주변의 널서리며 농가들도 농작물 때문에 걱정이라 한다. 세상이 가뭄 때문에 이렇게 힘들어도, 농사와 상관없이 사는 사람들은 집안에서 물을 틀면 펑펑 나오니, 이런 일들은 아마도 까맣게 모르고 살 것이다. 안다 해도, 내 일 아니니 상관없다 싶으리라, 그러나 인연법상 한쪽이 이렇게 힘든데 그 여파가 다른데 번지지 않을 리가 없다. 단지, 모르고 있을 뿐이다. 요즘 문득, 노자 선생님이 많이, 생각나는 것은 아마도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그분의 말씀 때문일 것이다. 無爲自然무위자연이라 하였다. 그 뜻이 아무 하는 바 없이 자연스럽게, 그게 놀고먹으라는 뜻은 물론 아니다. 자연스럽지 않은 것, 즉, 자연에 거스르는 것을 안 한다는 것이다. 작금의 세상은 행마다 자연에 反반하는 일들이다. 어쩌면 자연에 보탬이 되는 일 보다는 자연을 해하며 사는 것이 인간과 인공이 하는 일일 지도 모른다. 그것 또한 그렇게 가야 하는 일이라면 그 누라서 그것을 막을 수 있으랴. 그러나 인간도 자연이고 보면 자연이 망가지면 당연지사 사람도 망가지게 되어 있는 게 세상 이치이다. 지금 동부는 폭설에 홍수에, 서부는 가뭄에, 세계 안팎으로 자연 재해가 끊이지 않고 있고, 남극의 빙산이 녹고 만년설이 사라지고 있다 해도. 기계 문명 속에 사는 사람들은 그런 것이 피부에 와 닿지 않는다. 그러나 이 중은 자연이 하는 말을 그냥 흘려들을 수가 없다. 당장의 가뭄도 걱정이지만, 그보다는 자연이 그렇게 하고자 한다면, 그 까닭이 있겠지, 왜 그러는지, 그 뜻을 아는데 온 마음을 기울인다. 그리고 현재의 가뭄이 훗날 무엇으로 우리를 치게 될 지, 그 지점을 조심스럽게 바라보게 된다. 사람들은 지금쯤이면 이미 올라왔어야 할 그 많던 수선화가 올라오지 않고 있음을 모른다. 작년에 비해, 지천 이어야 할 들꽃들이 피어나지 않는 것도 모른다. 사람들은 봄이 온 줄은 알고 있을까. 봄 꽃이 왜 안피었는지는 알고 있을까. 모른다면, 그들에게는 아직 봄이 오지 않은 것이다. 봄은 왔으되 그들은 만나지 못한 것이다. 게임을 하고, 드라마를 보고, 일터를 오갔어도, 봄은 만나지 못한 것이다. 현대인은 계절을 모르고 산다. 여름이 얼마나 더운지 모르고, 겨울이 얼마나 추운지 모른다. 더운 날엔 시원하게 살고 추운 날엔 따뜻하게 산다. 이러한 일들이, 자연을 등한시 하는 일련의 이런 일들이 자연을 섭섭하게 하고 화나게 하고 급변하게 하는 일은 아닐까. 늘 말하지만 우리는, 세상은, 重重無盡중중무진, 서로를 반영하고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이쪽에서 출렁 하면 저쪽이 출렁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고 그것이 인연법이다. 頭頭物物두두물물이 인이 되어 연을 만들어, 연과 연이 이어져 세상을 만드는 것이기에, 내가 행복하기 위해서는 너까지 행복해야 하고, 우리를 품어 살리는 자연이 건강해야 우리도 건강 할 수가 있다. 세상 한쪽 어딘가 아프다면 바로 우리가 곧 아플 날이 온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적어도 우리는 우리가 사는 세상의 아픔에 무관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혼자 세상을 구할 수 있으랴. 그러나 개인이 전체가 되므로, 또한 혼자서도 구할 수 있기도 하다. 자연이 하는 말과 슬픔과 기쁨을 각자가 알고 느끼게 된다면, 당연히 자연이 필요한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봄을 보자! 잘보라고 북을 두드려도 그댄 못보니, 봄이 오면 꽃들은 누굴 위해 피는가. 打鼓看來君不見 百花春至爲誰開-설두중현雪竇重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