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봄
굳었던 땅이 완벽히 소프트해지는 2월엔 나무를 죽기살기로 심는다. 시기를 놓치면 이 중도 나무도 여름내 몸살을 해야 살리고,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심기, 끝나면 5에이커에 가득 차는 풀과의 씨름, 마당에 종일 엎어져 있기, 트랙터로 풀밭 깎기, 그리고 땅이 굳어져 풀이 주춤하는 이 사월엔 자갈 실어나르기, 신축, 개축 등등, 심고 가꾸기 외의 불사를 하게 된다. 늘 그랬는데, 그게… 이곳에 와서 처음, 올핸 ‘해왔던 대로’가 안되고 있다. 겨울에 와야 할 비가 안 오고, 때아닌 마른 돌풍에, 늦비에, 봄의 헤일, 이른 봄에 확 더웠다가, 다음날 서리가 내리고, 스프링클러를 틀었다 잠갔다를 반복하고, 여린 잎이 된서리 맞아 죽고, 때 아닌 헤비레인에 물에 잠긴 새싹들이 썩고, 한창 핀 꽃이 후두둑 지고, 막 맺히던 매실 알이 다 떨어지고, 배달 온 트럭은 들판에 스탁되고, 한밤중 번쩍이며 토우차가 오고, 쿠보타 두 대가 웅덩이 속에 쳐박히고… 왜 이러지? 뭐가 문제지? 일꾼들도 이 중도 놓친 것이 있었다. 이 지역 기후가 변한 것이다! 조짐은 몇 해 전부터 있었지만 묵과한 건. ‘해오던 대로’에 걸려서다. 자연이 변하고 있고 해마다 그 변화의 폭도 커지고 있는데, 그 변화를 보면서도, 제자리로 돌아오겠지, 무시하였다. 자연과 삶을 같이하고 있는 영화사 규칙에 이런저런 차질이 생기는 건 어쩌면 당연하다. 애써 실어다 나른 자갈밭이 뒤엎어지고 땀 흘려가꾼 가든이 토우차에 다 패이고 정성들인 다년초 꽃들이 죽어가는 걸 회복하느라, 감자만한 이가 이리저리 홀로 뛰며, 두통은 통증이지 고통이 아니다. 슬픔은 슬픔이지 고통이 아니다. 운재천 수재병, 운재천 수재병…중얼중얼중얼…중이 얼이 빠지면 중얼인가? 혼자 실소하며, 이 봄을 다시 배우고 있다. 자연의 변화를 숙지, 하지 못한, 부주의에 대한 과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자연의 불규칙성에 다가갈 수가 없다. 기후 변화가 진정 심상치 않음을 안다 해도, 어찌 그 자연의 운행을 다 알랴, 거대하여 볼 수 없는, 인간 한계 저 너머에 있는, 그 거시적인 싸이클에 대한 무지. 인간이 과연 그걸 알 수 있을까. 감히 자연을 보호, 할 수 있을까. 자연을 누가 제일 망치고 있는지는 알 수 있을까. 이 곳에 십년을 살아, 이제 어느정도 날씨 패턴을 알겠다, 했는데, 그 십년 세월로 인한 정보가 이해보단, 그 싸이클의 이해를 가로막는 장애가 됐을 지도 모른다는 깨달음이 왔다. 식자우환, 알아서 생긴, 안다, 에 갇힌. 안다고 하는 걸 제일 싫어하면서, 뭘 안다고 삼천대천세계의 움직임을 어찌 안다고. 지진에 태풍에 봄의 폭설에 집중폭우에, 여기뿐만 아니라 미국 전체가 자연재해로 힘든 봄이었다. 그런 인연법에 문득 내가 뭐 잘못 한게 없는가, 짐짓 돌아보며 부처님께참회하는 정도가 이 봄 자연 앞에서 할 수 있는, 전부다. 전에도 말했듯, 자연은 자연이 그럴만해서, 자신의 일을 알아서 한다. 피고 지고 눈 내리며 비 내리고 돌풍 불고 가물고 하며. 인연법에 충실하며. 아프면 뒤틀고 더러우면 물벼락으로 씻어내며 그렇게. 자연, 스스로 그러한 것, 그렇게 온것, 여래다.인생도 자연인 이상, 자연의 그러한 연을 따라 흐를 수 밖에 없다. 해서, 삶도 따라 변한다는 걸 늘 깨어 바라봐야 한다. 안그럼 크게 다친다. 행복만을 바라서도, 슬픔을 거부해서도 안된다. 기복이 언제나 있는 것이다. 실패는 상처지만, 자연 앞에서는 언제나 겸허해져야 함을, 다시 얻게되어, 마음 한편 신선한 봄이다. 잠시 잊었던 초심으로 돌아가게 만든, 불규칙한 자연에 감사하며, 이 봄에 성장통을 앓고 있는 십년차 캘리포니안은 말한다. 삶은 절대로 안정적으로 규칙적일 수 없다. 그래서 상처지만 그래서 더 행복하게 살고 싶어진다. 그러니, 그대들, 기뻐하라. 삶의 변화무쌍함을. 올해도 기꺼이 상처받고, 까짓거 울고 웃자. ‘자연’스럽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