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구
뒤뜰에서 죽은 나무 둥치를 줄톱으로 자르고 있는데, 마침 절에 들른 보살님이 줄톱 가지곤 안되고 더 큰 톱이 필요할 거라 제안한다. 얼마 전만 해도 절의 도구라고는 망치, 못, 드라이버 정도 들어 있던 도구함이 전부였는데, 5에이커나 되는 들판에 이사 오고부터 이젠 삽, 괭이, 갈퀴, 낫, 블로우, 삼지창, 일레트릭커터 등등등 새로운 도구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농촌 출신이 아니므로 그 중에는 난생 처음 보는 도구들도 있다. 당연히 도구를 적재적소에 쓸 줄 모르고 아직 웬만한 일은 몸으로 한다. 반면에 불자들은 ‘이걸로 하면 쉬워요,’ 하면서 요상한 도구들을 줄줄이 들고 오지만, 결국 삽과 망치의 변형체일 뿐이란 생각이다. 세상 사람들은 ‘수월’한 것에 중요한 점수를 주고 편하다면 아무리 비싼 대가도 다 지불 하려 하지만 이 중은 편안한 것에 맘을 안 내는 관계로 남보다 몸이 더 시달린다. 그렇다 해도 ‘이거보다 저걸 쓰면 더 편안할 텐데’라는 말을 잘 안 듣는다. 세상의 모든 편안한 것은 반대급부로 그 편안한 만큼의 공해와 해악을 가지고 있음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자동차 같은 것이다. 빠르고 편안한 것에 사람들은 돈을 지불한 듯 보이지만, 배기가스 라든가 소음, 사고로 인한 인명피해도 돈을 주고 산 것이다. 모든 편리는 그런 것이다. 그렇기에 편리가 좋지 않다. 고장 났던 것이 어떻게든 고쳐지면 그만이다. 그것을 ‘편리’하게 하자고 많은 이들이 가라지에 수많은 스툴을 쟁이고 살지만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마당일을 거드는 불자들이 하나둘 ‘편리’한 스툴을 사오는 것이 맘이 편치 않다. 쉽긴 하겠지만 반드시 필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쉬움에 점수를 주지 말고 그냥 힘들게 살자고, 우리가 쉽게 가려하기 때문에 세상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음을 좀 알아달라고 사정해도, 그 뜻이 잘 전달되지 않는다. 때로는 영원히 소통하기 어려운 일음을 느낀다. 피차 사는 세상이 다르기 때문이다. 옛말에 ‘솜씨 나쁜 목수가 연장 탓 한다’고 했듯이 일 잘하는데 있어 도구가 최선은 아니다. 그 도구를 사용하는 사람이 문제인 것이다. 우리에게는 가장 훌륭한 도구인 우리 몸이 있다 이 몸을 잘 쓰면 굳이 하찮은 편리에 피땀흘려가며 번돈을 가져다 바치지 않아도 된다. 도구는 일을 할 때 쓰는 연장을 말하지만 한편 도 닦는 물건을 뜻하기도 한다. 도 닦는 물건으로는 이 몸 만 한 것이 없다. 이 몸이 있어야 도도 닦는다. 그리고 절에서 하는 모든 일은 바로 몸으로 하는 것이며 그 몸을 잘 움직이게 하는 것이 마음이다. 그 몸과 마음공부 하는 곳이 절이다. 그런데 몸으로 하는 것은 되도록 안하고 뭐든 어떻게 하면 편리하게 해볼까 해서는 공부가 될 리가 없다. 그것은 일할 생각도 없이 괜한 연장이나 사다 나르는 것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스툴이 창고 가득 하다고 내가 움직이지도 않는데 일이 되는 건 아니다. 그런 뜻에서 우리 불자들이 절에 자꾸 편리한 도구를 사오는 게 좀 불편하다는 것이다. 결국은 저는 절에서 일을 자주 안 하고, 스님은 쓰질 않아, 창고만 비좁게 만들 뿐아니라, 가장 중요한 건 편리한 도구를 찾는 그 마음은 또한 불교를 하는 그 마음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불교는 몸을 편히 두고서 할 수 없다. 몸으로 하는, 아주 기초적인 백팔배도 힘들고 삼천 배는 더더구나 힘들고 참선도 힘들고 울력도 힘들고 뭐든다 힘들기 때문이다. 몸이 편하기를 바라는 이들은 그래서, 몸 하나만 있으면 삼척동자도 할 수 있는 불교가 어렵다. 세상에서 가장 좋은 도구는 몸이다. 그 도구는 편안함을 추구하면 할수록 녹슨다. 그 녹스는 것을 방지하자는 것이 불교의 수행법이다. <법구비유경>에 전한다. ‘활 만드는 사람은 뿔을 다루고 뱃사공은 배를 다루며 목수는 나무를 다루지만 지혜 있는 사람은 자기 몸을 다스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