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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에게

          얼마 전 두 차례에 걸쳐 부처님 석상을 도둑맞았다. 영화사 입구에 모셔져 있어, 절에 들고 나는 식구들의 사랑을 받았더랬다. 이웃에게 말했더니 첫 마디가 게이트를 닫으라, 였다. 나는 문 닫고 사는 것도 싫고, 도둑질은 나쁜 일이나 어쨌든 부처님 좋아서 가져간 것이니 잃어버린 와중에도 나쁘진 않다, 했더니 이웃은 황당해 했다. 우리 식구들은 속도 좋아, 한국인은 삼세판 아이겠냐며 마지막으로 못 훔쳐가게 아주 큰 사이즈의 부처님을 모셔오자 했다. 지금은 그 세 번째 큰 부처님이 영화사 입구에서 미소 짓고 계시다. 미국 땅에서 부처님을 인터넷으로 파는 것도 신기하고 그걸 훔쳐간 것도 신기하다. 인터넷에 있다는 건 소비가 있다는 거고 이 땅에 부처님을 좋아하는 이가 많다는 증거다. 부처님을 훔쳐간 사람도 그 부처님이 좋아서 가져갔다. 그런데 그 도둑 맘을 당최 알 수 가 없다. 부처님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부처님 무서운 줄도 알아서, 절집에서 뭘 가져간다는 것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이다. 남의 것을 훔치지 말라는 부처님 계율에도 위반이다. 그러니 그 훔친 이는 부처님 좋아하는 입장에 서 있을 수 없다. 그렇담 싫은데 가져가나? 아무튼 남의 것을 훔치는 그 맘을 여러분은 아는가? 나로서는 아무리 하려 해도 그 훔치는 마음을 이해할 수가 없다. 나로선 좋아 취한 것이 훔친 거라면 갖고도 절대로 행복할 수 없다. 그런데 두 번이나 남의 것을 훔치고도 과연 편할지. 편할 수도? 세상에는 답이 1만 있는 게 아니다. 같은 상황에서도 서 있는 자리에 따라 그 세상이 다르다. 남쪽에 서 있는 이에겐 북산이 북쪽에 있는 이에겐 남산이 되는 거처럼. 그 도둑은 훔치는 게 좋아서 도둑이다. 훔치는 게 좋지 않은 이는 당연 도둑이 안 된다. 나는 죽어도 도둑질을 하는 그 입장을, 그가 사는 세상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 훔친 자의 입장을 이해하려면 내가 도둑이 되어야 조금이나마 알게 될 테니. 도둑은 또 내가 이해 안 될 거다. 도둑을 맞고도 도둑 맞을 걸 자꾸 가져다 놓으니 말이다. 그래서 세상살이에서 이해라는 것은 진짜 아렵다. 서 있는 입장이 다르기 때문이다. 날마다 세간에서 벌어지는 오해와 편견과 투쟁들은 바로 이해 불가에서 나온다. ‘전체를 이해하지 못하면 진리를 알 수 없다.’는 부처님 비유법, ‘눈 가리고 코끼리 만지기’이다. 눈을 가린 상태에서 코끼리를 만지게 되면 서 있는 자리에 따라 코끼리는 퉁퉁한 기둥이다, 붓 같이 생긴 것이다. 거칠고 평평한 것이다, 등등으로 전혀 다른것이 된다. 결론은 다 맞기도 하고 다 틀리기도 하다. 이것은 옳고 그름이라는 법으로 판단할 수 없는 부분이다. 그리고 이해라는 부분으로도 해결이 안된다. ‘바른 이해’는 모두가 코끼리를 ‘정확히’ 알 때만 가능하다. 한 쪽이 정확히 알고 있더라도 다른 쪽이 모르면 이해 불가이다. 상대방을 이해하는 것도, 집단을 이해하는 것도, 세상을 이해하는 것도 다 마찬가지다. 자기 입장에 서 있으면 그거 밖에 못 본다. 입장이 다르면 이해도 없다. 이것이 세간에 늘 존재하는 갈등의 요소이다. 다름에 대한 불인정. 이해 불가, 소통 불가. 이 갑갑함을 어떻게 해결하고 사는지? 처처에서 속 터질 일 투성이인데 어떻게 견디며 사는지? 어찌 살아야 하는지? 다름,을 인정하는 것이다. 다름은 너가 아니라 나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전체라는 입장에서 생각해 봐야한다. 내 입장 말고. 팔만 사천의 사람이 있다면 팔만 사천의 세상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것을 깨달아 알면 삶이 좀 더 편해진다. 시야가 넓어지고 너그러워진다. 근데 말이 쉽지 그게 잘 안 된다. 왜 안되는지 알아야 한다. 탐진치 삼독이다. 그걸 제거하는 법, 수행이 필요한 것이다. 수행을 우습게 알지 말라. 그건 머리로 안된다. 머리로 백천 번 이해해도 내 수행이 없이는 행이 안 된다. 도둑이 부처님 좋아서 가져갔으니 괜찮다는 내 맘을, 남의 것을 훔치는 그 맘을, 대문을 꽁꽁 닫으라,는 그 맘을 순간 다 헤아려 알 수 있다면 당신의 삶은 늘 평온할 것이다. 도둑에게 전한다. 이 인연으로 미래엔 철통같은 부처님 제자가 되기를. 세세생생 부처님 머리에 이고지고 모시며 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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