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진등
미국에 와서 겪어 보니, 이곳 교포들은 추석 즈음에는 평소하지 않던 고향 얘길 많이 한다. 왜일까. 날씨도 좋고 먹을 것도 풍성했던, 가장 행복했던 때를 추억하는 것일까.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여기서도 늘 한국에 사는 듯 살던 이들이 이때만은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말한다. 중국의 고전<예기>에서 비롯된 사자성어로 수구초심이 있다. 여우는 죽을 때 머리를 고향으로 향하고 죽는다는 뜻이다. 그게 신기해서 나온 말은 아니고 ‘한낱 짐승도 제 근본을 잊지 않는데 사람이랴’ 라는 뜻으로, 근본과 초심의 중요성을 가르치는 말인데, 다른 한편 고향을 그리워하는 뜻으로도 쓰인다. 요즘에는 고향이라는 말 자체도 잘 쓰지 않거니와 여기 교포들도 예전만큼 한국이 그리워 절절 매지는 않는다. 한국 물건도 지천이고 맘만 먹으면 쉽게 갈수도 있는, 물리적인 거리가 그만큼 가까워졌기 때문이지만, 무엇보다 진정 ‘고향’을 가지고 있는 세대들이 이젠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칠팔십 된 이들을 빼면, 그 이후 세대들은 어디서 왔건 다 같은 도시의 아파트단지 출신이니까 말이다. 이런 사정이기에 고향 그리워 눈물짓는 것도 다 지난 얘기가 되었다. 명절 때 이미자 같은 가수들이 교포 ‘위문’ 하는 시대가 아니라 싸이 같은 가수가 나와 한국을 ‘자랑’하는 시대이다. 또 굳이 한국에서 살지 않아도 여기서 ‘한국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실시간으로 한국의 뉴스와 코미디 프로를 보고, 주중, 주말 드라마를 줄줄 꿰고, 한국의 유행어를 쓰며…가끔 이 산승은 이들이 ‘여길’살고 있는지 ‘저길’살고 있는지 알 수가 없어진다. 눈치 채셨겠지만 그렇다, ‘지금, 여기’ 얘기를 하는 것이다. 과거에는 너무 한국을 추억하며 살았고, 지금은 추억이 아니라 아예 ‘거기’에서 살고 있다. 몸만 여기 있지 한국에 사는 이들과 진배없이 산다. 같은 문화와 시간, 같은 공간을 느끼고 거닌다. 가상의 언터넷 세상 안에서이다. 그리하여 과거에나 현재에나 ‘여기, 바로 이 순간’을 살지 못하는 것은 여전하다. 그때는 그리움이라도 현실이었지만 지금은 그도 없이, ‘저기’사는 듯이 비현실적인 세상을 산다. 그래서 이들이 낯설다. 갈수록 이들이 누군지 점점 더 모르겠다. 미국에 살면서도 미국의 트렌드 보다 한국의 트렌드를 아는데 더 많은 시간을 쓴다. ‘미국에’ 살고 있을 뿐 ‘미국을’ 살고 있지 못하다. 과거에 ‘여기’를 내가 살지 못했다면 미래에도 그럴 수 없다는 존재 증명이다. 오해마시길. 그름과 옳음에 대한 얘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과거의 나는 현재의 나이며 현재의 나는 미래의 나’라는 얘길 하는 것이다. 각자의 인생에서 살아 있는 시간은 오직 현재일 뿐이다. 그런데 그 현재를 ‘여기’서 살지 않는다면 당연히 그 삶은 이곳의 결과로 구체화 될 수 없다. 미국에 백년을 살아도 여전히 이곳에 ‘없을’것이다. 그것은 마치 꿈속을 사는 것과 같다. 꿈에서 먹는 일처럼, 구체적이고 현실적일 수가 없다. 언제 어디서나 ’지금 하고’ 있는 것이 바로 나이고 나의 인생이다. 그런데 그 ‘나’가 늘 둘로 갈라져 있다면! 그것은 지금 여기, 바로 이 순간’을 가르치는 입장에서 보면 대단히 어렵고 쓸쓸한 일이다. 상대가 ‘여기’ 없기 때문이다. ‘여기’를 보시오, 해도, 그들은 어제나 ‘저기’에 있고 ‘저기’를 지향하고, 그곳의 세상과 비교하고 그곳의 사람들에게 보이고, 인정받으려 한다. 그런 삶에는 당연히 ‘여기’는 없게 된다. 그것은 수구초심도 그리움도 그 무엇도 아니다. 앞에서 수구초심이란 근본자리를 잊지 않는 것이라 했다. 불가에서의 근본자리란 내 근원, 내 본성, 내 진면목이다. 그것이 초심이다. 무명으로 매해서 잊고 있는 그 자리, 그 초심을 발견 하는 때가 바로 깨달음의 자리이다. 그것을 살아생전 ‘지금 여기서’찾아내는 것이 중요하지, 설령 죽어 안들 무슨 득이겠는가. 문제는 몸과 마음이 ‘여기’를 함께 살지 않으면 그것은 영원히 불가능 하다는 것이다. ‘初發心時便正覺 초발심시변정각 生死涅槃常共和생사열반상공화’ -초심을 드러낸 때가 바로 정각이라, 생사와 열반이 늘 하나로 화합하느니. -法性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