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림
오월은 삼계 대사(大師)이시자 사생의 자부(慈父)이신 부처님께서 오신 달이다. 우연이랄까, 속세엔 스승의 날과 어버이날이 있는 달이기도 하다. 세인들이 자신의 은사와 어버이에게 감사할 때에 절에서는 부처님 오신날을 축하하기 위한 대대적인 축제를 벌인다. 축제임에도 불구하고 오월이 오면 버릇처럼 살림걱정을 하게 된다. 절에 찾아오는 이들에게 비빔밥 한 그릇이라도 넉넉히 대접해야 하고 준비할 것도 많은데, 영화사 살림살이가 넉넉지 않기 때문이다. 하여, 초파일 비용도 불자들에게 부탁해야 하는데, 어쩐 일인지 이 일은 해가 갈수록 더 어려워진다. 불자도 많지 않거니와 절에서 행해지는 보시의 의미와 그 공덕에 대해, 진심으로 이해하는 이가 많지 않다. 사실 보시란 온전히 자발적이어야 하는데, 해주십사, 해야한다는 거 자체가 바로 어려운 현실을 대변해준다. 손톱 깎을 일 없이 닳도록, 매일 이 너른 절집을 돌보는 일은 너무나도 고달프지만 이것에 비하면 차라리 너무 쉽게 여겨진다. 살림, 이라는 간단한 그 말 이면에는 얼마나 많은 것이 담겨 있는지, 한 가정의 살림을 책임지고 있는 가장의 입장이라면 이미 알 것이다. 절집 살림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절에는 가장이 없다. 아니, 있긴 있는데 그 이가 걸사, 즉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빈손의 납자이다. 이런 이가 살림을 꾸린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지만 하고, 있다. 기적에 가깝다. 이판승 사판승이 있는 큰 절의 경우, 이판승들은 도를 닦고 사판승들은 살림을 살고 불자들은 근기에 맞게 절을 지원하겠지만, 그 모든 것이 거두절미인 이곳에서는 이판사판 홀로 해야 한다. 절 사정에 대해 제집 살림처럼 걱정하는 불자도 없다. 당연하다. 어쩌다 한 번 절을 찾는 이에겐 절은 원래 그 자리에 있는 것, 그 절이 어떻게 운영되는지 궁금할 이유가 없다. 이를테면 어쩌다 공원 같은 데 가서 그 공원은 어떻게 운영 되는지 우리가 궁금해야 할 이유가 있는가. 그런 아름다운 공원의 뒤편에는 수영장 관리부터 쓰레기 처리까지 공원 관리에 필요한, 수많은 인력과 비용이 있다 한들, 그것이 방문객과 무슨 상관인가, 말이다. 이러한 일을 방문객에게 하소연하는 공원이 있다면 그곳에 가고 싶은 이는 한 명도 없을 것이다. 같은 이유로 절의 속사정도 꺼내놓기 어렵다. 가능하다면 신도들은 영원히 모르게 하고 싶은 것이 또한 이 산승의 마음이기도 하다. 하여, 해마다 이 무렵이면 몸은 비록 ‘저 푸른 초원위의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살고’ 있지만 마음만은 집도 절도 없는 운수납자가 부럽다. 하지만 모든 것을 버리고 출가한 몸, 가난이 두려워서는 결코 아니다. 가난은 승려의 기본이다. 가진 것도 원할 것도 없어, 너무나 홀가분하고 당당한, 대 자유인인 것이다. 세상 모든 이들이 부를 추구하지만, 그런 거 다 하찮다 여기는, 세상 부러울거 없는 이가 스님이다, 단지 이 몸 하나 가난한 것은 아무 것도 아니나, 초파일 잔치를 앞에 둔 입장에 서면, 어버이 환갑잔치 앞에 둔 가난한 가장처럼, 살림걱정을 잠시 하게 된다는 것이다. 걱정이긴 하나, 앞으로도 오랫동안, 이 문제에 관한한은 시원한 돌파구는 없지 싶다. 그리하여 어제도 오늘도 절 살림은 여전히 어렵지만, 살림을 산다는 건 진정 아름다운 일이다. 한국 불자와 불교를 살리고, 아름다운 모든 인연을 살리려고 죽어라 살림을 사는 것, 되도록 죽임 없이, 생을 살려내고 있는 것, 이것이 절집의 ‘살림살이’ 인 것이다. 그 소중한 일을 하고 있기에 행복하고, 불교 역사 지난한 이 지역에 아직도 영화사가 건재하고 있음은 지대한 행복이기에, 오늘도, 걷는다. 지난 오년간 미국에서의 오월은 늘 이렇게 시작되었다. 올해도 그렇다. 그래도 좋다. 부처님 제자로서의 삶이 최상의 행복임을 가르쳐주신, 서가모니 부처님께서 오신 달이기 때문이다. ‘가난한 부처님 제자, 실로 이 몸은 가난해도, 도는 가난치 않음이라, 가난한 몸엔 항상 누더기를 걸쳤으나, 도를 얻은 마음에는 무가보(無價寶)를 감추었도다.’ -증도가(證道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