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사화
8월이면 한국의 절집에는 상사화가 많이 핀다. 절에 상사화가 많은 이유를 두고, 스님이 웬 여인을 짝사랑 하다 죽은 자리에서 상사화가 났다는, 다소 믿기 어려운 전설 때문인 줄 알지만, 미안하게도 그건 세인들이나 할법한 얘기고, 실은 상사화는 절집에서 꼭 필요한 꽃이다. 상사화 뿌리에서 나온 전분은 절집의 탱화나 불경 같은 중요한 서화류의 좀과 부패를 방지하는 탁월한 방부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 중요한 이유 다른 한 가지는 ‘잎我相이 온전히 죽어야만, 비로소 꽃本性이 드러난다’는 마음 공부하는 수좌들에게 꼬 필요한 가르침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 영화사도 상사화가 한창이다. 보면 볼수록 신기한 꽃이다. 겨울에서 봄에 이르기 까지 푸르고 싱싱하던 잎이 초여름 접어들면 마치 녹기라도 한 듯이 갑자기 시들어 없어진다. 그리고 거기 잎이 있었던 거조차 잊어버린 어느 날, 아무것도 없던 맨땅에서 불쑥 꽃대가 솟아오르고, 솟아오른 뒤엔 금방 자라 올라, 어어, 하는 새에 신비한 꽃을 툭, 하고 토해낸다. 향기도 좋고 꽃도 오래 가거니와 모습도 아름답다. 잎이 없어서 홀로 더 고고해 보인다. 이처럼 상사화는 잎과 꽃이 비록 한 몸이지만 영원히 서로 만나지 못한다. 사랑하나 만나지 못하여 든 상사병처럼, 잎과 꽃이 만나지 못하는 꽃의 습에 사람의 감정을 이입시켜, 상사화라는 이름을 붙인 우리네 선조들의 낭만이 느껴지는 이름이 아닐 수 없다. 세상풍파 다 거친 어른들치고 그리운 사람을 만나지 못하는 애달픔을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다. 이별과 그리움이 인생사에는 늘 있어왔기에 우리 선조들은 함께 해야 마땅한 잎과 꽃이 영원히 만나지 못하는 것에서, 상사화란 이름을 떠올리게 됐을 것이다. 우연찮게도 상사화가 피는 이 8월에는 칠석도 있다. 견우와 직녀가 일 년에 한번 만나 눈물을 비가 되도록 흘린다는 날이, 음력 칠월칠일 칠석날이다. 견우 직녀는 비록 일 년에 한번이라도 만나기나 하지만 상사화는 잎과 꽃이 서로 영원히 만나지 못한다. 그러나 만나지 못하는 애달픔은 사람의 정서이지, 정작 그 상사화는 잎은 꽃이, 꽃은 잎이 있는지 알지 못할 지도 모른다. 이왕지사 이름이 상사화이고 보면 잎과 꽃이 서로의 존재를 모른다, 쪽 보다는, 서로를 너무 그리다 죽는다는 쪽에 점수를 주고도 싶지만, 뭐 꽃사정이야 꽃만이 알 일이고, 어쨌거나 상사병에 걸리면 죽는다. 한쪽이 죽지 않고서는 만날 수 없는 것. ‘백천간두에서 손을 놓아야만 비로소 생사에서 벗어난다’는 선법과 많이 닮아 있다. 참으로 오묘한 뜻이다. 나를 죽여서 나를 만나는 도리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너무나도 잘 알기에, 한쪽을 온전히 버려서 눈부신 꽃을 피워 올리는 상사화를 보고 있자면 숙연해지기도 한다.이생에 한번쯤 간절히, ‘나’ 만나길 고대한 이들은 견우직녀처럼 반드시 만날 날도 있겠지만, 진정한 ‘나’의 존재조차 몰라 그립지도 않다면 영영 만날 기약조차도 없는 일이다. 아는가. 우리는 사진이나 거울을 통해서만 자신의 얼굴을 보았지 자기 얼굴을 자기 눈으로 직접 본 적이 없다. 죽어서는 한번쯤 볼 수 있을까? 이런 사정이고 보니, ‘나’를 모르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그리하여 누군가 나의 존재 증명을 해주길 바라고 알아주고 사랑해주길 바란다. 그래서 내 인생을 당당히 살지 못하고 늘 남의 평가나 남의 시선을 의식하며 힘들게 살아야만 한다. 그러다 어느 날 나를 알아주던 주변인이 사라지면 하루아침에 인생이 허무해진다. 그 허무를 감당하기 위해서라도 기필코 ‘나’를 만나야만 한다. 노력이라도 해야한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만나야할 그 ‘나’가 애초에 없었던 듯 잊고 산다. 당신은 어떤가? 상사병이 날 정도로 당신의 진면목이 그리운가? 죽어서라도 한번 쯤 만나고 싶은가? ‘사람도 空하고 법 또한 空함이라, 두 가지 相이 본래 같은 것이라, 생함이 없는 본성을 알고자 하면, 마음 밖의 행적을 끊어야 한다.’; -부대사傅大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