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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즉사(生即死)

          오월에 피어야 할 등나무 꽃이 지금 활짝 피었다. 보랏빛 선명한 꽃이 보는 이를 청량하게 한다. 등나무를 비롯해서 영화사에는 덩굴식물이 많다. 여름내 대문 앞에서 주황색 나팔을 불어대는 능소화, 건강한 아이비, 재스민, 부겐빌리아, 머루, 포도, 줄장미…덩굴 식물은 의지할 것을 뭐든 가져다 주고 중간중간 묶어주면, 그 모양대로 아주 잘 자란다. 그런데 자기가 나아갈 곳이 아니다 여겨지면, 아무리 열심히 끌어다 묶어줘도, 뻗은 가지를 스스로 말려 죽인다. 몇번을 해도 마찬가지다. 엊그제도 그렇게 죽어버린 나뭇가지를 잘라주다가 문득, ‘이렇게 자기를 죽이는 것이 쉽지 않던데…’ 죽어라 참선 공부하던 시절이 떠오르면서 등골이 좀 서늘하여졌다. 자연과 가까이 섞여 살다 보면 때로, 삶의 지중한 뜻을 벼락처럼 마주칠 때가 많다. 그래서 자연에서 살아야 한다고 옛 선인들은 그렇게 마르고 닳도록 설파 했나 보다. 그것을 농사를 짓고 부터 새삼 더 많이 깨닫는다. ‘죽지 않으면 살수 없다’는 선법禪法을, 사람도 아닌 덩굴식물이 매일 심상히, 묵묵히 실천하고 있었던 것이다. 만약 죽음이 없다면 이 세상은 어떻게 될까! 사람은 누구나 죽고 싶어 하지 않는다. 죽음이 두렵다. 그런데 살기 위해서, 자기를 가차 없이 죽여 버리는 등나무 덩굴에서 나는 ‘生卽死생즉사, 死卽生사즉생’ 의 불법佛法을 본다. 죽지 않으면 살 수 없고 살지 않으면 죽을 수 없다. 이 세상은, 생은 생이기 때문에 죽어야 하고, 죽음이 있어야 생이 존재 할 수 있다는, 분명한 인연법상에 놓여 있다. 그렇기에 만약 삼라만상 모두가 생만을 주장한다면, 이 세상은 개미도, 풀도, 나무도, 사람도, 쓰레기도 가득 넘쳐나서, 결국은 폭발하고 말 것이다. 등나무 덩굴의 예처럼, 죽음은 소멸이 아니다. 또 다른 생을 위한 변화일 뿐이다. 몸과 영혼은 원래 하나라는 일원론적인 입장이나, 분리하는 이원론적인 입장에서는, 이 生과 死의 문제를 해결 볼 수 없다. 죽어서 영혼이 어디에 간다 해도 이해 불가요, 갈 게 없다 해도 이해불가다. 왜냐, 사후를 누가 증명할 것이냐. 말 그대로, 죽어도 모르는 일이다. 죽은 자가 와서 말을 했다는 일은 고래로 없었으므로, 지금껏 사후 세계는 일반론으로 개념화 되지 못한 것이다. 아시다시피 부처님은 이 둘 모두를 취하지 않으셨다. 정신과 물질이라는 것으로 분리, 시키는 것을 하지 않았다. 그렇게 분리, 하게 되면 이쪽이든 저쪽이든 이미 ‘있다’라는 것이 전제되기 때문이다. 연기론緣起論이 아니고서는 존재, 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것이 부처님의 입장이었기 때문에, 생과 사가, 정신과 물질이, 몸과 영혼이 따로 존재한다, 말씀하지 않으신 것이다. 세상만사 오직, ‘이것이 있으므로 해서 저것이 있는 것이고, 저것이 소멸되므로 해서 이것도 소멸되는’것이다. 생이 없으면 또한 사도 없다. 그것을 물질이냐 정신이냐 규정, 할 수도 없다. ‘물질은 결국 공이요, 공인 즉은 물질’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영원히, 답답하게, 같은 질문을 계속해야 할 것이다. 죽음은 반가운 것도 아니지만은 그렇다고 나쁜 것도 아니다. 누구는 가고, 누구는 온다. 그 순환이 없다면, 우리가 사는 세상도 있을 수 없다. 해서, 고래로부터 먼저 세상을 떠난 이들에 대한, 조의와 감사가 우리 삶 속에 깊이 녹아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생주이멸을 통해 지금껏 여기, 이 사바세계에 존재해왔다. 그 존재, 또한 고정불변이 아니고, 시시때때 변하고 흐른다. 흘러흘러 어디로 가는가. 물이 구름이 되고 구름이 비가 되고 비가 물이 되듯이. 그런 것이다, 심플. 그러나 생과 사라는 구획이, 물질적인 이 몸이 여기 있고 없음이라, 죽어라 믿고 사는 이들에게는, 통하지 않는 말임을 안다. 하지만 이것은 명명백백한 것이다. 이것을 자신이 믿지 않고, 이해 안 된다 해서 틀렸다, 우긴다면, 이 중으로서도 도와줄 방법이 없다. 우란분절에 즈음하여, 죽음의 참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본다. ‘공부를 지어감에 있어서 죽고 살지 못할까 두려워하지 말고, 다만 살아 죽지 못할까 두려워할지니.’-무이無異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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