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生)
날씨가 따뜻해지면서 흰개미들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벽을 물어뜯고 구멍을 내며 날아 오른다. 털마이트 박멸 회사에서 하는 광고를 보면 순식간에 집을 무너뜨린다고 겁주니, 살짝 걱정이다. 대중 토론의 결론은 전문 업체를 불러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마어마한 비용 때문에 언감생심이다. 비용은 어쩌면 핑계고, 실은 그렇게 다 죽여야만 하나 망설이고 있다. 별무소득이지만 죽이지 않고 쫓는 방법은 없는가, 갖은 시도를 해보고 있다. 차마 대 놓고 죽일 수 없어, 집둘레에 살충제를 뿌려 보지만, 그도 마음은 편치 않다. 세상의 모든 살아있는 것들은 최선을 다해서 생을 지향한다. 생은 바로 삶이다. 삶이란 살다, 라는 말에서 나왔다. 즉, 살아있는 모든 것은 사는 것이 일이다. 그것이 바로 생활生活이다. 썩은 둥치에서도 새잎은 돋고, 얼어붙은 도심의 콘크리트에서도 민들레는 핀다. 바퀴벌레들은 수없이 몰아내도 다시 살아나며, 세상의 이런저런 생들은 지금도 열심히 생명 유지에 골몰하고 있다. 왜 살아야 하는지, 근원적인 의문 같은 것이 들기도 전에, 누가 채찍질 하며 살라고 강요하지 않아도, 이미, ‘살고’ 있다. 그렇기에 생은 살지 못함을 가장 두려워한다. 죽음 앞에서 당당할 생은 절대로 없다. 그런,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너무나도 잘 알기에, 해충이라 이름하고-누가?-그들의 생을 쉽게 빼앗을 수가 없다. 벌레를 없애고자 약을 치면, 그 벌레를 먹는 새들이 죽고, 그 새들이 죽으면, 벌레들은 전보다 더 늘어난다. 이것이 세상의 벌레들이 줄지 않는 이유다. 자연이 알아서 개체수를 조절하고 질서를 잡게 두면 되지만, 사람은 당장 급하고, 불편을 감수하며 기다려줄 마음이 없다. 생명들을 기르는 농사꾼의 입장에서도, 때론, 딜레마에 부딪친다. 벌레들과 농작물 모두를 살리는 일이 쉽지 않은 것이다. 최대한 살리는 방향으로 하고 있지만, 털마이트 경우처럼 난감한 때를 만나게 된다. 봄은 모든 생이 솟아오르는 -스프링- 계절이다. 그리하여 모든 생이 가장 치열하게 생의 일을 하는 그러한 계절이다. 새들도 나무들도, 물도, 살아, 흐르는 것에 집중하는 시기이기에, 서서 가만히 귀 기울이면 수많은 생들의 강한 외침이 들린다. 이렇게 생의 중심에 서 있다 보면, 나는 과연 잘 살아내고 있나, 삶을 반추하게 되고, 한시라도 헛되이 보내지 않으려 노력하게 된다. 부처님의 불방일不放逸의 가르침도 이러한 맥락이었다. 모든 생이 치열한 이러한 때에, 누워 빈둥대는 것은 생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몸을 편히 쉴 날은 굳이 노력하지 않아도, 언젠가는 찾아온다. 방금 전까지 멀쩡히 살다가 호미 날에 찍혀 죽는 지렁이처럼. 그렇기에, 생을 사는 동안은 생을 치열하게 살아주어야 한다. 그리고 나와 마찬가지로 다른 생들의 치열한 삶도 존중해주어야 한다. 그것이 부처님 제1계, 불살생不殺生의 법이다. 불살생의 법은 ‘죽이지 말라’가 아니다. 생을 죽이지 않음, 즉, 생명존중에 그 포인트가 있다. 그 어떤 생도, 다른 생의 죽임 없이 생을 살아내지 못한다. 이것이 무서운 생의 무게이다. 그렇게, 다른 생의 목숨으로 살고 있음을 알아, 그 삶의 지중한 무게를 눈뜨고 보라, 이다. 죽이지 말라, 하면 반발할 사람도, 이러한 생의 무게를 깨닫게 되면, ‘함부로’ 생을 해치는 일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생이다. 왜 사는지 이유는 없다. 당근은 당근인 것처럼 생은 그저 살아야 하는 것이다. 너무 간단하고 당연한데 물어 뭐하겠는가. 그저 살아내는 일에, 일분, 일초,에 기쁘게 올인 하면 되는 것이다. 이 봄에, 다른 생을, 한번만이라도 진지하게 지켜보라. 개미, 새싹, 피어나는 꽃송이…거기에서 물아일여物我一如를 느낀다면, 당신은 세상의 모든 생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닫게 될 것이다. 우리네 삶이 아름다운 이유도 살아있기 때문이다. 거기에 부나 명예나 그런 것을 덧대지 않아도, 생은 그 자체로 빛나고 아름답다. 그리고 아무리 하찮은 생도 살 권리가 있다. 우리의 삶을 위해서도 우리는 세상의 살아 있는 모든 존재들과 함께 가야할 필요가 있다. ‘강인한 생명의 모습이 인간의 눈에 비친 봄의 이미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