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밑에
한해 끝자락에 서니, 지난 허물과 청산해야 할 감정들이 떠오르는가? 잘못한 일 많아, 혹여 지옥 갈까, 걱정되는가? 사람들은 천당과 지옥이 있는가, 때로 묻는다. 천당과 지옥이 있느냐, 없느냐에 대한 답 이전에, 천당이 뭔지 지옥이 뭔지 당신은 알고 있는가? 천당은 하늘 저 위 어디, 지옥은 땅 저 밑 어디. 천당은 상당히 좋고 지옥은 심각히 나쁘다, 정도가 일반적인 상식 아닐까. 사과를 모르면서 사과가 있나 없나 물을 수 있나? 천당과 지옥의 유무를 묻기 이전에 먼저, 천당이 뭔지 지옥이 뭔지부터 알아야 한다. 또 그 전에 있다, 없다는 무엇인가, 라는 심오한 문제도 풀어야 한다. 있다, 없다, 는 누가 규정하는가, 이다. 거의 모든 세상의 ‘있음’이 가설과 연구와 경험과 증명, 등을 통해 학습 되어지지만, 실은 그것을 정확히, 안다, 라고 할 수는 없다. 당신이 공기를 알고 있고, 있다, 라고 믿고 있다면, 그렇게 있음,을 확신하는 근거는 뭔가? 이런, 세상의, 수많은, 정확히 알지 못하는 일들을, 왜 당연히 있다, 여기게 됐는지, 그 이유를 안다면, 천당도 그렇게 있다. 공기하고는 차원이 다르다고? 어떻게 다른가? 이쯤에서 여러분은 ‘대의단’을 일으켜야 한다. 저 ‘투루맨쇼’의 짐 캐리처럼, 누군가 임의로 정해놓은 세상에 갇혀, 그 세상만이 진짜라 여기며 살고 있는 건 아닌지, 궁금해져야 한다. 있냐, 없냐, 이전에 내가 세상을 정확히, 알고, 있는가를. 그 다음엔 있다,는 것은 무엇인지, 없다,는 것은 무엇인지를. 이 세상엔 분명 천억짜리 차를 타는 이가 있다지만, 이 중의 세상에선 있어도, 없어도 그만이다. 세상엔 엄연히 굶어 죽는 삶이 있지만, 모두가 그런 세상이 있다는 걸 알고 있지는 않다. 묻는다. 아프리카에 ‘이따도시’라는 동물이 있는가? 없는가? 사자는? ‘이따도시’엔 답을 못해도, 사자는 있다고 대다수가 답할 것이다. 사자가 있다, 라고 어찌 믿을 수 있게 됐나? 안다고 여겨서다. 이렇게, 사람은 자기가 ‘안다고 믿는것’을, 있다, 없다, 로 규정한다. ‘이따도시’에 대해선 못한다. 모르므로. 천당과 지옥도 당신이 확실히 알고 있다면, 존재하냐, 아니냐에 대한 태도도 명확히 할 수 있다. 확실히 알면 된다. 하지만 아예 모르는 이에겐 그 유무 자체가 의미 없다. 모르는 건 있다, 없다,고 구분을 못한다. 결국 천당과 지옥도, 천억짜리 차도, 우주도, 사자도, 사상도, 각자의 식의 선택이다. 선택 후엔, 유무도, 믿을지 말 지도 온전히 당신의 것이다. 사람마다 선택이 다르므로 사는 세상도 다 다르다. 모두의 세상에 당연히 사자가 있는 건 아닌 것이다. 지옥 천당 또한 마찬가지다. 유무에 무관치 않다면 당신은 이미 그 세상을 선택한 것이다. 지옥이 두려우면 당신에겐 지옥이 있는 것이고, 착하게 살아야 한다. 천당에 가고 싶으면 천당 역시 있는 것이고, 또한 착하게 살아야 한다. 착하게 산다면 유무를 떠나, 천당과 지옥 자체도 전혀 다르지 않은 문제다.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다. 이 중은 천당과 지옥을 모른다. 당연히 있는지 없는지도 모른다. 천당 지옥, 상관 없이, 어떤 유무에도 시비 없이, 아는 척 없이, 마음 편히 사는 게 최고이고, 그러기 위해선 공성을 깨닫는 것이 최선임을 안다. 공성 안에서는 유무도 시비도 없다. 공이란 세상만물 없다,가 아니라, 유무, 시비 같은 것이 없는 자리를 뜻한다. 공성을 깨달으면 세상 편하다. 시비를 가리고 유무를 가리고 이득을 가리고 하는, 아상에서 불편함이 온다. 마음 불편한건 행복이 아니다. 이기와 아상을 떠나면, 천당도 지옥도 걱정 없다. 허공에 무엇이 걸리랴! 그것은 유무를 떠난 초월의 자리, 자유, 그 자체이다. 그래도 그 유무가 여전히 궁금하시다면, 스스로 명확한 답을 찾으시라. 아니면, 죽어서 간다니, 그때에 가서 규명해 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