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여행
피지 타베우니 섬에 있는 날짜 변경선 표지판 위에는 선이 하나 그어져 있고, 선의 동쪽에는 ‘어제’라고 써 있고 서쪽에는 ‘오늘’ 이라고 써 있다고 한다. 날짜 변경선이라는 게 있다는 건 누구나처럼 알고 있었지만, 한 마을에, 어제와 오늘이 그렇게, 눈에 떡 보이게 공존하고 있다는 것은 처음 알았다. 최근 한국을 다녀왔는데, 방문 중에 우연히 현대미술관에 갔다가, 구민자 작가의 작품에서 이 사실을 만났다. 흰 벽에 비춰진 동영상 속에서 서로 마주보고 선 사람들이, 날짜 변경선을 넘어 ‘어제’에서 ‘오늘’로, ‘오늘’에서 ‘어제’로 넘어가는 퍼포먼스를 펼치고 있었다. ‘어제’인 28일에서 하루를 보내고, ‘오늘’인 29일로 넘어가면, ‘오늘’은 29일에서 30일로 변해 하루를 건너뛰게 되고, ‘오늘’에서 ‘어제’로 넘어간 쪽은 ‘어제’가 ‘오늘’ 30일 전날인 29일로 되므로, 같은 29일을 두 번 살게 된다. 어제와 내일로 옮겨가는 그 조용한 행위가 이행되는 동안, 저 멀리 야자나무 이파리 위로 바람이 소리없이 불고 있었다. 일순 온 몸에 소름이 돋으면서 슬픔이 밀려와 당황스러웠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 그것은 처절한 진실과 직면했을 때의 충격 같은 것이었다. ‘세상엔 아무 것도 없다’를 어쩔 수 없이 다시 확인한! 인간이 정한 시간이라는 것이 날짜 변경선 위에 있는 저 야자수한텐 어떤 의미일까. 사람이 그 날짜 변경선의 어제로 계속 가게 되면 절대로 늙어 죽지 않을 수 있을까. 오늘 있었던 일이 사라질까. 시간이란 게 이렇게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않지만, 역시 세상은 찰나찰나 변한다. 과연 시간이 갔기 때문에 변했다고 할 수 있나? 시간은 무엇인가? 아인슈타인은 상대성 이론을 통해 시간이란 걸 증명하려 했지만, 중력과 시간과의 관계 또한 증명하려 했지만, 그 차이는 인간이 알 수도 없고 이론에 불과할 뿐이며, 지금까지 아무도 시간에 대한 정의를 내놓지 못하고 있다, 아무도 시간을 모른다. 시간처럼 이상한 것도 없고, 알지도 못하면서도 느끼고, 매이며, 있다고 여기며 사는 것 또한 이상하기 그지없다. 시간은 이처럼 알 수도 , 가질 수도 없는데 우린 시간에 쫓겨 살며 시간이 없어서 늘 해야 할 일을 못한다고 한다. 인간이 정해 놓은 24시간이라는 것은 과연 인간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 걸까?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아무리 하루 24시간으로 쪼개졌다고 해도, 개체별로의 시간은 각자의 방식대로 흘러가며 개별적으로만 살 수 있다는 것이다. 빵을 한 시간에 걸쳐 먹을 수도 있고, 한 시간 분량의 중대한 일을 하면서 빵을 먹을 수도 있다. 시간이라는 것이 한 시간 흘렀고 빵도 하나 동질로 사라졌지만 그 흐른 시간은 같지 않다. 인간이 정해놓은 시간은 그냥 숫자일 뿐, 시간의 흐름도 질도 양도 각자의 방식으로 흐른다. 같지 않고 같을 수도 절대로 없어서, 똑같은 시간은 세상에 없다. 시간이 얼마 흘렀는가와 만물이 변화하는 것은 별개 문제다. 저 피지에서처럼 아무리 어제로 건너간다 해도, 내일로 시간을 건너뛴다 해도, 각자의 변화의 속도는 변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굳이 시간에 얽매일 필요가 있을까. 확실한 건 변경선을 넘어 어제로 가든 내일로 가든, 움직이는 그 순간은 언제나 오늘, 여기, 라는 것이다. 그 오늘을 살라, 는 것이 부처님의 주된 가르침이다. 이론 물리학자 카를로 로벨리는 말한다. “시간에 대한 현재의 난관을 푸는 방법은 그 자체를 잊는 것이다”라고. 시간 따위 연연하지 않고 ‘오늘’을 살면 그뿐이다. 오직 ‘오늘’만이 영원히 지속된다. 그것은 시간이 아니다. 변화일 뿐이다. 아상을 갖고 보면 시간에 끝이 있고 죽고 사라지지만, 그 상을 벗어나면, 그냥 ‘오늘’일 뿐이다. 연말이니 어쩌니, 시간이 없니 갔니, 내일 하니 마니 하지 말고, 다만 ‘오늘’을 절실히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