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의 드라이브
팔월, 하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이 중은 당연 광복이다. 당신도 광복, 혹은 삼복 더위가 떠오른 수도 있고 팔월에 이별한 여자, 혹은 바다 같이,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업이 다르기 때문이다. 같은 부분도 있다. 동업이라 부른다. 도대체 이 업이란 게 뭔가? 딱 맞다고 볼 순 없지만 흔히 카르마로 번역된다. 어쨌거나 업에는 먼저 신구의 삼업이 있다. 몸과 입과 뜻으로 짓는 업이다. 그 중 선업, 악업, 이도저도 아닌 무기업이 있다. 쉽게 말해, 나, 라고 여기는 ‘내’가 속으로 짓든 겉으로 짓든, 몸 이라는 통 속에 온갖 것을 주워 담는 걸 말한다. 흔히들 ‘몸통’이라 부르지 않는가. 그 통 속에 온갖것이 채워진 상태가 붉은 색이면 붉게, 푸른 색이면 푸르게, 달 같다면 밝게, 부처님 같다면 부처로 보이게 하는 힘을 말한다. 업을 매 찰나 어떻게 굴렸느냐가 바로 지금의 당신이다. 업이 같은 이가 있다. 그런데 갑은 매일 수행하고 을은 누워 빈둥댔다면, 그 날이 백일 혹은 천일이 지나면 두 업은 달라진다. 왜 갑은 행을 하고 을은 안했는가. 그 부분이 우리가 쉽게 간과하는, 잘 안 믿는, 전생업이다. 좋은 게 분명한 걸 알아도 안 하고, 나쁜 게 분명한 걸 알아도 하게 하는 힘, 이기도 하다. 이런 자신의 업을 인정하고 알아, 윽, 하고 바꾸게 되면 전생업도 현업도 미래업도 바뀐다는 데에 불교의 특출한 가르침이 있다. 바꾸는 힘, 그 윽, 하는 힘이 수행이다. 수행은 참선도 되고 절도, 요가도 기도 등, 방법은 많다. 한마디로 정리하면 계정혜 삼학이며, 팔정도요, 실천행의 핵심인 육바라밀이다. 수행이 없인 업을 바꿀 수 없다. 늘 말하지만 안다고 되는게 아니다. 자동차를 속속들이 안다고 운전을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아무리 알고 백번 생각해 봐야 한번 끌고 나감만 못하다. 수행이라는 습을, 업을 어떻게 운전하느냐, 그건 당신에게 달렸다. 엘에이까지 간다고 치자. 그 길은 정해져 있다. 카르마라 부르든 인생이라 부르든. 쉬든가 부지런히 가든가 꽃 보며 가든가 화내며 싸우며 가든가. 같은 길이 당신의 업과 습에 따라 길이도 시간도 사건도 달라진다. 습이란 글자는 백번의 날갯짓에서 나왔다고 한다. 이게 옳지 않다, 여기면서도 어쩐지 게으르게 늘 누워 있다면, 이미 백번 하여 업으로 굳어진 것이다. 업장이 두텁다, 라고 한다. 업장이 두터운 이는 수행도 어렵다. 어려우니까, 힘드니까, 싫으니까 해야한다. 쉬운 건 누구나 한다. 쉬운걸 하는 건 업장소멸이 아니다. 어려운 걸 이기는 힘, 천 번의 절을 하면서, 하기 싫은 걸 이기며 하면서, 육바라밀을 처처에서 실천하면서, 즉 선업을 쌓으면서 생기는 힘을 말한다. 선업의 힘으로 악업을 밀어내는 것이다. 즉 몸통의 쓰레기를 맑은 물을 자꾸 부어 비워 내는 것이다. 몸을 맑고 향기롭게! 서있는 말에게 채찍질 하는 이는 없다. 당연히 달릴 수 없다. 불자가 되는 것도 채찍이 우선이다. 굳은 업장을 깨부수기 위해서다. 절에 올 때는 적어도 업을 바꾸자고 오는 것인데, 미혹으로 땅땅 굳어진 업을 들고 와 스님을 훈계하고 희롱하고, 당최 왜 왔는지 모르게 하고 가는, 업장 두터운 이들을 자주 본다. 이런 이들에겐 채찍질이 필요 없다. 업을 바꿀 의사가 없다 여겨, 먼 소릴 하든 오냐오냐 맞장구치고 차 먹여 보낸다. 이 중 아니어도 인터넷에 가면 ‘안다’는 스승 천지인 시대다. 마치 춘추전국시대를 방불케 한다. 이런 때일수록 바른 스승이 필요하다. 그러나 스님 말조차도 못 듣는 그대, 어디서 시비를, 마음을 쉬랴, 보내며 불쌍해 눈물 난다. 달릴 거고 달리는 말에게 채찍질도 의미 있다. 굳어 송장 같은 이에게 수행을 하라, 선업을 굴려라 소리칠 수 없다. 부처님은 그런 이를 ‘귀가 없다’표현하시고 ‘구제할 수 없다’하셨다. 지금 수행의 채찍을 스스로 맞는 그대, 오늘 부처님의 나라로 드라이브 중이다. 선업을 쌓는 중이다. 그 업을 처처에서 자비행으로 회향할 때, 그대는 부처의 현신이다. 그런 그대에게 엎드려 절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