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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회輪回

          영화사 앞에는 구 하이웨이인 16번 도로가 지나가고, 도로 건너편으로는 지평선이 하늘과 맞닿아 있는 너른 초지草地가 펼쳐져 있다. 여름이 오기 전, 풀이 푸른 동안에는 그 들판엔 어디서 왔는지 모르는 방목하는 소들이 나타났다가, 그 풀이 누른빛으로 변하면 사라진다. 너른 초원에 띄엄띄엄, 검은 점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는 풍경은 쉼표, 그 자체이다. 정원에서 일하다 멀리서 소 울음 소리가 들리면, 때마다 속으로 ‘네 알았습니다.’ 화답하곤 한다. 행자시절 어른 스님들이 늘 말씀하셨다. 게으르면 죽어 소로 태어난다고. 그리고 죽을 때까지 일한뒤, 죽어서는 살은 물론 뼈까지다 시주받은 이에게 내주고, 그 가죽은 북이 되어, 게으르게 산 표본으로, 동네방네 얻어맞으며 돌아다녀야 한다고. 양말이 하루 멀다하고 구멍이 날 정도로 부지런히 돌아다녀도, 그런 말을 수없이 들어야만 하는 것이 절집의 행자行者다. 죽어 소가 된다는 것이 사실인지 아닌지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어른이 그렇게 말씀하시니, 그저 믿고, 정말 죽어서 소가 되고 싶지는 않다, 하면서 더 부지런히 몸을 놀렸다. 그 업業이 발발하여 이 머나먼 이국땅에 와서도 소 울음에 ‘네. 부지런히 살겠습니다.’ 화답하게 되는 것이다. 후에 <벽암록>을 읽다가 게으른 승려가 소된 얘기가 실지로 있음을 보고, 그저 어른 스님 지어낸 말이 아니구나, 새삼스러웠던 기억도 살아난다. 지금은 부지런 할래서가 아니라, 부지런 할 수 밖에 없는 농사꾼으로 살다보니, 죽어, 소가 될 까닭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건만, 그래도 소울음이 ‘머어’, 들릴 때마다 정신을 번뜩 차리게 된다. 농사일은 끝이 없다. 휴일도, 하루치의 일과란 것도 없다. 비가 오든, 춥든 덥든, 늘 그 자리에 있어주어야 한다. 죽어 어찌 소가 될까보냐, 그래서는 아니다. 이제는 문자文字, 그 자체에 현혹되지도 않거니와, 소로 태어날까 무섭지도 않다. 거꾸로 저 소는 죽어서 절대로 저렇게 힘든 중은 되지 말아야겠다, 생각할 지도 모른다. 간혹 윤회輪回는 신자와 불신자간의 시비是非 거리가 되지만, 시비, 그 자체는 아무 의미 없다. 어차피 시비한다는 건 피차 모른다는 증거다. 쌍방이 다 확실하면, 그 자리에 시비는 없다. 불교의 윤회는 ‘내가 죽어서 그 무엇이 된다,’ 라는 일차원적인 문제가 아니다. ‘나’란 것도 없거니와, 이 몸은 인因과 연緣이 만나서 지금 잠시 화합의 상태로 여기 있을 뿐이다. 그 인연집합의 상태가 어떤 식으로 현재를 만들어 가느냐에 따라, 그 업이 연연이 이어져 새 결과물로 재생산 된다는 것이지, 누구나 게으르면 죽어서 소가 된다는 식의 문제가 아니다. 불서佛書에 그런일이 있다하니, 있었나보다, 세상에 뭔 일이든 없겠는가. 다만, 윤회란 게 지금 ‘나’란 놈이 있어서, 그 놈이 죽어, 다시 태어난다는, 단 한 가지 사실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는 거다. 불교는 문자로만 이해하기 힘들다. 즉, 선한 업을 지으면 내생에 선한 사람으로 태어난다, 는 맞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나’라는 것은 아니다. 늘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보지 말고 달을 봐야’한다. 죽어서 소가 되는게 무서워 꾸역꾸역 일하는 어리석음 보다는, 부지런히 살라, 는 말에 경계가 있음을, 재빨리 알아차리는 것이 중요하다. 소가되든 바람이 되든, 윤회는 있다. 지은 업대로 지은 본분대로 반드시 돌아온다. 그것이 내가 나라고 믿는 ‘나’, 그얘기가 아닐뿐이다. 인연법을 말하는 것이다. 인연법 없는 윤회란 있을 수 없다. 그래서 진실한 마음으로 인과因果를 믿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인과를 믿는다면 윤회를 믿게 되고, 그리하면 지금 어떻게 살아야 할지가 확실히 보인다. 인과법을 믿으면 함부로 막사는 따위는 절대로 못한다. 결론은 늘 같다. 불교는 ‘지금’ 잘 사는 법이다. 그것은 또한 윤회의 포인트이다. 죽어서 어쩌고, 가 아니다. 해서, 언제 어디서나 필요한 건, 시비 이전에, 인연법을 확실히 알고 행하는 것이다. “여기 극히 공부에 게으른 자가 있으니, 그는 늙어가는 저 소와 다름없네, 그저 몸뚱이만 컸을 뿐 지혜는 전혀 자라지 않았네.”-<법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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