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물
언젠가도 언급한 적 있지만 영화사엔 커다란 유칼리툽스 나무가 많다. 기른다,는 일의 속성이 대개가 그렇지만, 사람 일 시키는 걸로 최고다. 그래서 아마도 향기 좋고 아름답고 그늘 크고 사철 푸르나 정원수로는 다들 안키우는 듯하다. 사철 낙엽에 기름조각 지저분 떨어지고 여름 내내 허물을 벗는다. 떨어지는 껍질 조각도 크고 제법 많아서, 치우는 일 보통 아니지만, 다 나쁘기만 한 건 없어서, 허물 벗고 새몸 드러나면 깨끗하고 향기 은은, 보기에도 좋다. 더러 일부분은 껍질을 벗지 못하고 그냥 붙어있기도 하는데, 그 부분은 얼룩지고, 잘 자라지 못해 우묵해진다. 허물을 벗는다는 것은 성장과 관계가 있단 얘기다. 사람도 때론 자신의 굳은 허물을 벗어내야만 성장 가능한 건 아닐까, 조석으로 치우며 생각한다. 남의 허물은 이리도 성가시고 눈에 잘 뜨이듯이, 우리네 허물도 그렇겠지, 벗어버리지 않고 있음 확실히 보기 싫겠지, 마음 공부하게 된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허물이 있다. 그러나 그 허물을 혼자 알아채긴 힘들다. 현대는 점점 독신도 많고 독거도 많아지는 추센데다 더구나 여기 미국은 굉장히 개인적이고 타인에게 관여하는 걸 꺼려하는 듯하다. 그리하여 누군가의 간섭이나 조언 없이 사는 성인 대다수가 좋게 말해 개성이고 나쁘게 보면…자신만의 방식으로 굳어, 있다. 허물을 허물로 못보게 되면 굳어 단단해져 벗어내기 힘든 고집과 악습, 아만이 되기 쉽다. 이기적인 방향으로서의 보수, 과거에 대한 집착, 오만과 편견, 등등, 버리지 못하면 성장도 힘들다. 본인의 성장을 막는건 본인 손해니 그리 살라한다쳐도, 세대간의 갈등과 나아가 다툼의 원인이 되는 건 생각해 볼 문제다. 모든 갈등의 주된 원인은 서로 다르다는데 있지만, 그 보단 상호가 자신의 굳은 껍질을 인정 않고 고수하려는 데서 일어나는 편이 많다. 때로 버릴 줄 모르면, 자신이 오래되고 낡은 껍질을 고수하고 있는 줄을 잊게 된다. 그래서 어쩌다 지적이라도 받으면 노여워진다. 꽉 막혔다 소리 들으며 외로운 인생을 살게 된다. 고통이다. 낡은 껍질은 버려야 할 때가 오면 버려야 옳다. 탈피해야 할 허물은 비록, 맨살이 아프게 드러나더라도 버려야 한다. 버릴 수 있을 때 버렸을 때, 비로소 큰 나무처럼 아름답게 서 있을 수 있게 된다. 그러나 못보면 버릴 수도 없다. 점점 심해지는 계층간의 간극과 갈등도 각자의 허물을 보지 못하는 것과 관계가 있다. 구신세대 간의, 남녀간의 , 종교상의, 인종간의, 빈부간의, 사제간의, 하다못해 가족간에도, 사회 전반에 걸쳐, 서로의 자리에서서, 꼰대니 지적질이니 뭐니 하며 자신의 허물보단 상대방의 허물에 집중하는 양상이다. 모든 충돌과 혐오의 요인을 곰곰 보면 양쪽이 다 옳고, 허물 또한 언제나 양쪽에 다 있다. 입장, 이라는 것이 다른 것이다. 황새다리 분질러 참새다리에 붙여 같게 만드는 게 능사가 아니다. 허물로 보자면 긴 것도 짧은 것도 허물이다. 문제는 남, 을 내가 바꾸려면 힘드니 각자가 바꿀 수 있는 나,의 허물을 관여할 수밖에 없다. 모든 나무가 허물을 벗진 않는다. 마찬가지로 고수냐, 버리냐 도 자신의 문제다. 각자의 선택이다. 개인적으로 살수록, 그래서 자기 성찰이, 수행이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무변, 무주, 무아, 무상, 부처님은 이렇게 다양한 언어로, 한계를 짓고 고착된 채 살지 않기를, 누누이 가르치셨다. 그러기 위해 필요한 건 뭐? 지혜, 제 허물을 보기 위해서야말로 밝은 지혜가 진정 필요하다. 무명이면 보기 힘드니까. 밝음,은 스스로를 비추며 타인을 빛나게 한다. 어둠을 빛이 밀어 내듯이 그렇게. 밝음 앞에서 무슨, 누가, 허물을 고수할 수 있으랴. 버리고, 일신우일신, 날마다 새롭게 태어날 수 있기를, 버리고 가볍게, 밝은 삶을 살 수 있기를. 기원하며, 이 중은 오늘도 유칼리툽스의 껍질을 치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