쌈채소를 들고 칠구가 왔다. 저 시비의 점심 모임 이후의 첫 방문이다. 목적은 영화사 이전 소식을 들었고, 이사할 새절에 법단이 필요하다면 본인이 맡아 하고싶다는 것이다. 이이 바깥사람이 이런 일에 전문에 가까운 손재주가 있다. 나는 전의 일에 대한 미안한 마음의 발로라 여겨지지만, 이 제의를 받을 것인지에 대해선 흔쾌히가 안된다. 이들은 올구를 등지고, 나를 '델꼬' 가 주지를 시키려 했던 그 절의 신도들이였으며, 그들은 그 절의 스님에게 단체로 찾아가 그 절에 더이상 안 나가겠다며, 절을 열 때 보시한 돈을 돌려달라고! 시비했던 일련의 무리들이다. 그 스님과 그 절에 얽힌 사연은 양측의 얘기를 한자리서 정식으로 듣지 못했기 때문에, 잘잘여부를 따지고 싶지도, 알고 싶지도 않지만, 실지로 가서 돈을 받은 한 당자를 알기 때문에, 그 보시를 돌려달라고 한 ㅡ보시금이 큰 액수라면 조금이라도 이해가 됐으려나ㅡ그 사실은 진실이므로, 그런 사람들을 내 세상에 눈썹 하나도 들이고 싶지 않다는 입장이다. 후에 올구에게 물었을 때, 그들 중 돈을 받은 쪽과 아닌 쪽이 있었는데, 칠구는 그 돈을 받지 않은 쪽이라 한다. 왜서 이런 어마무시한 사건이 발발했는가는 영원히 알고 싶지 않다. 그럴리도 없겠지만, 설령 잘못이 스님에게 있다손 쳐도, 그건 내 세상에서는 전혀 이해될 수 없는 일이기에, 아예 없는 세상이라 치부하는 것이 맞다고 여긴다. 그러나 중적으로다가 보시, 하겠다는, 그것도, 불단,이라는 중요한 일을 스스로 하겠다는데, 실은 여기저기 불단을 짜줄 이를 써치하고 컨택하고 하고 있는 와중에, 스스로 불단을 이고 걸어들어왔으니, 부처님 뜻인가 싶고, 그렇다면 막아서는 안되는 게 아닌가 싶어, 아니다, 소리를 하기가 어렵다. 또한 중이 불사에 호불호를 내세울 수도 없고, 보시하겠다는데 어쩌랴 싶어, 일단은 받아 들이기로 한다. 그리고 영원히 그 시비거리도 안고 살아야 한다는 것도 마음에 걸어둔다. 그들은 영화사도 안 나오고, 없어진 절을 안고 영원히 그 절 스님을 시비 삼을 것이고, 불만을 토로할 것이고, 그 상대는 떠난 스님도 아니고, 나도 아니고, 칠구일 것이기 때문이다. 단지 그 이유만은 또 아니다. 그 바깥 양반은 다 좋은데 이런 일을 하는 이 특유의 곤조가 있다. 안 만나봐도 안다. 어여어여 해주어야 일을 하는 성격이고ㅡ예를 들어 후에 수고했다며 일정액을 수고비로 주자, 너무 기뻐하며 기꺼이 그걸 돌려주었다ㅡ그걸 잘 해주면 불단에 금이라도 입혀줄 이나, 나는 그런 일처리 방식을 좋아 안 한다. 해서 오프닝날까지 이 일은 완성이 안되고, 그는 기어이 그 어깃장을 보여준다. 오프닝날 아침, 법단 문짝 하나가 안 달렸고, 뭐가 없어서 못했다, 한다. 나는 문 없이 그냥 오프닝을 하겠다, 한다. 안된다던 문이 올구가 과일과 차를 낸 뒤, 왠지 제대로 달린다.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 속세를 살고 있는 속인이라면 모르되, 중적으로다가는 니가 해주려면 해주고, 안 되도 그만이다, 이다. 암튼, 어찌어찌 그나마 깜냥껏의 불단이 이 척박한 환경의 이국에서 만들어진 것을 보니ㅡ베이에서 단을 전문으로 짠다는 이를 쓸 수도 있었다. 그는 스님을 상대로 처음부터 장사를 하려 들어 잘랐다. 그냥 지성껏 해보겠습니다, 했으면, 나는 피를 팔아서라도 부른 값에 보너스까지 치렀을 것이다ㅡ 감사함과 함께, 그동안 치른, 여러 일꾼에 대한 피곤함이 밀려온다. 이 일을 계기로 칠구는 영화사의 일원이 된다. 불심이 자란다면 언젠가 현 영화사에 스며들 것이지만, 그 보시금 회수 무리의 당자였던 한은, 불자로서 영원히 깔끔하진 않을 것이다. 어쩌랴, 인연법이 그런것이라면. 그렇게 불단 문짝을 마지막으로, 오프닝은 제 날짜에 무사히 치루어진다. 오프닝에 우루루 참여한 이 지역의 불자연 하는 사람들은 그 수가 얼마가 됐든, 내겐 불자가 아니다. 왜냐하면 장차 다 정리가 될 것임을 이미 안다. 인정할 만한 영화사 신도는 단 네 명, 앞으로 일 년에 한 명씩, 참 불자를 더 만드는 것, 두 번 째의 나의 소명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