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다리가 찾아왔다. 오랜만이다. 이이는 전에 한두번 영화사에 온 이인데, 한때 일종의 전국구 불자였다. 이곳저곳 다니며 어느 절에도 적을 두고 있지 않은 이를 말한다. 몇 년 전에 영화사 근처로 이사왔다며 한 번 들른 적이 있다. 근처로 욌으니 영화사 신도 되겠다, 때문은 아니고, 이곳 정토 지역장을 맡게 되었다는 걸 알리러 왔다. 원래 정토였는지, 전향을 한 건지는 모른다. 이 지역 불자 중 정토로 옮겨간 이가 제법 있다. 이걸 개종으로 여기진 않는 눈치다. 굳이 찾아와서 나한테 보고하는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젠 이쪽 불교 안한다, 라고 말하는 거라고 나는 여겼다. 그 후 몇 년 만에 다시 온 것이다. 온 이유는 본인이 속한 그룹이 3천배를 영화사에 와서 하고 싶으니 허락해 달란 것이다. 중적으로다가 3천배를 하겠다는데 얼마나 대견하냐 싶어 내줄 수도 있지만, 나에겐 반갑지 않은 저간 사정이 있다. 나는 정토 하는 이를 사회 활동 분야라 보지, 불교하는 이라 여기지 않고, 호감을 갖고 있지 않다. 미국 와서, 그들이 이곳 절과 스님들을 대하는 태도를 익히 들어서 알고 있었고, 나도 겪었다. 따르는 법이 다른 것은 차치하고라도, 그들은 이 지역 절과 스님에 대한 향심이 없다. 그리 대하는 건 그들 자유고, 그런 그들에게 호의가 없는 건 내 자유다. 근래 들어 3천배에 꽂혔는가, 이들이 베이의 어떤 절에도 3천배 하게 해달라 오퍼를 했다가 거절 당했다고 들었다. 본인들의 구역에서 하든지, 왜 굳이 절에서 3천배를 하겠단 건지, 그 이유는 모른다. 터 밟기를 하는 건가, 도장 깨기를 하는 건가, 이유가 궁금하긴 하다. 3천배를 하겠다,는 말로는 아주 간단하지만, 절 공간을 하루 정도 사용한단 것은 결코 간단치 않은 일이다. 사람은 머물다간 흔적을 여러모로 남긴다. 그 뒷수습은 그들 몫이 아니다. 우리 신도들이 해얄 것이고, 신도들에겐 왜 낯선 이들의 뒤치닥거릴 해야 하는지 설명해야 할 것이다. 나는 키다리에게 한 번만 정확히 말하겠으니 토씨하나 틀리지 말고 가서 그들에게 가서 전하라, 한다. '단 1초도 당신들에게 내어줄 시간과 공간이 내겐 없다.' 그는 좀 놀란 듯 하더니,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여기로 보낸데는 자기가 스님하고 안면이 있단 이유인데, 스님이 거절을 하면 자기가 뭐가 되냐며, 자기 낯도 있는데, 한다. '불교엔 인과법이라는 게 있죠, 나는 그걸 좋아합니다. 보살님이 전에 내게 준 걸 돌려드리는 겁니다.' 알아 들었는지는 모르겠고, 그는 무추름 해서는 돌아갔다. 부러 단호하게 한 것은 그들이 나와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다고 여기길 바라서다. 그러지 않으면 번거롭게 또다시 대면해야 할 수도 있어서다. 처음 이이가 정토장을 맡게 되어서 집을 법당으로 만들었다 했을 때, 나는 좋은일 한다, 열심히 하라, 하고 보내었지만, 속으론 오래 가지 않을 것을 이미 알았다. 하지만 말은 안 했다. 그가 찾아왔던 현재 시점의 나는 처음과 많이 달랐고, 현재의 나와도 달라서, 아무나 꽃본 듯이 반기지 아니하기로 정한 때이다. 사실 스님이란 불자 아닌 이에겐 아무 의미 없는 사람이다. 그들에겐 불교도 모르는 세상이다. 출가인 쪽에서도, 살면서 불자 아닌 이를 따로 만날 일은 거의 없다. 어찌보면 스님은 불교 세상에만 존재하는 사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스님을 모르고 불자의 행을 모르는 이를 만난다는 것은, 이쪽에선 심히 불편한 일이다. 불편한 상황도 수없이 겪어봤다. 불교 공부좀 했다, 가지고는 절 세상을 알 수 없다. 불교 공부와 종교 활동은 전혀 다른 얘기다. 때로 이것을 같다고 여기는 일이 왕왕 있는데, 쉽게 구분할 수 있는 속세법으로 예를 들자면, 정식 학교를 다니냐 안다니느냐의 차이 같은 거다. 이런거 저런거 다 따지면 이곳에 남을 불자 하나도 없다고 누군가 내게 말한 적이 있다. 하지만 법은 법이다. 살짝만 빗나가도 정법이 어떻게 변할지 알 수 없다. 두 선을 나란히 그어보면 안다. 처음 0.0001미리의 오차만 있어도, 그 끝은 어머어마하게 벌어진다. 정법수호가 반드시 필요한 이유다.
